[다산칼럼] '진짜 법치'와 '가짜 법치'
우리 사회에서 가장 빈번히 사용하는 정치적 언어 가운데 하나가 법치(法治)다. 경제질서를 위한 중요한 개념이지만 잘못 이용하면 대단히 위험하다.

법치에 관해 ‘법에 따른 통치’ ‘법질서 바로 세우기’란 말을 자주 듣는다. ‘법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즉 법의 도덕적 품격을 묻지 않는다. 입법자가 정한 것이면 무엇이든 법이고 이에 따르는 걸 법치라고 한다.

그러나 ‘자유주의의 거성’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저서 자유의 헌법에서, 미국의 법철학자 론 풀러는 그의 책 법의 도덕성에서 각각 법치에 대한 통념에 정면 반박한다. “그런 법치는 반(反)시장적인 가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이에크와 풀러는 법치의 원칙으로서 소급입법 금지를 비롯해 법의 명확성과 일관성, 지속성 등 8가지를 제시한다. 예를 들면 대기업의 면세점 특혜처럼 법은 특정 그룹을 편애하거나 차별해선 안 된다. 법은 분배 목적을 비롯해 특정한 시장구조와 결과를 추구해선 안 된다. 법은 인격과 재산 침해 등 특정 행동을 금지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이런 성격의 법은 개인의 자유로운 거래를 용이하게 하는 자생적 시장질서의 틀을 확립한다.

국회 여당과 야당의 모순되는 법안 거래는 법이 될 수 없다. 과잉 입법도 법이 아니다. 법이 많으면 알기 어렵고, 행동지침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법이 빈번히 바뀌어 안정성이 없는 것도 법이 아니다.

이쯤에서만 봐도 국회의 입법이 얼마나 부도덕한지 짐작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가짜와 진짜 법치의 사상적 전제다. ‘가짜 법치’는 “법은 도덕과 엄격히 분리돼야 한다”는 잘못된 법실증주의를 전제한다. “법은 입법자의 명령”이라고 보면서 법 개념에서 도덕을 없앴다. “악법도 법”이라는 말도 실증주의의 소산이다.

실증주의는 의회의 다수결·주권론과 결합했다. “법은 국민의 대표기관에서 다수의 지지를 받으면 무엇이든 법이 된다”는 믿음이 확립됐다. 입법의 도덕적 평가와 입법의 한계를 위한 도덕적 원칙이 사라지고, 의회에 무제한 입법권을 허용했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한국의 입법부를 지배하고 있는 게 그런 두 가지 잘못된 사상을 전제로 한 가짜 법치다. 법은 입법자의 권력 수단이 됐다. 이른바 ‘차별·특혜 입법’ ‘입법 홍수’ ‘쓰레기 입법’ ‘벼락치기 입법’ 등 왜곡된 국회 입법을 표현하는 험한 말도 여럿 등장했다. 입법을 제한할 어떤 도덕적 원칙도 없기 때문이다. 국회가 오만불손의 상징이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진짜 법치’의 사상적 전제는 “법과 도덕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전통의 자연법 사상이다. “법 개념에서 도덕을 분리하려는 법실증주의는 옳지 않은 반(反)자유주의”라고 비판하는 게 그 전통이다.

주목을 끄는 것은 국회의 입법권을 제한해야 할 ‘진짜 법치’의 역할이다. 이런 법치는 법이 국가의 일방적인 명령이 되는 걸 막아준다. 법이 도덕성을 상실하면 한국 경제의 규제입법처럼 법이 ‘제도화된 권력의 시녀’로 전락할 뿐이다.

법이 시민 위에서 군림하는 일방통행적 규범이 되는 걸 막는 방어책이 도덕률로 무장한 ‘진짜 법치’다. 이는 개인이 타인과 평화롭게 공존할 자유로운 틀을 제공한다.

입법자들의 불완전한 지식 역시 ‘진짜 법치’의 내용을 구성하는 도덕률이 필요한 이유다. 그런 도덕규칙이 입법자들의 입법 활동을 위한 나침반이다. ‘완전히 아는 입법자’의 세상에는 나침반이 불필요하다.

법치의 도덕적 규칙을 통해서 입법을 제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국회의 입법집단이 야만적 탈을 벗을 수 있다. 아울러 문명화된 시민들로부터 존중과 신뢰를 받을 수 있고, 자유와 번영을 마음껏 향유할 수 있다. ‘진짜 법치’의 헌법적 제도화를 기다릴 뿐이다.

민경국 < 강원대 명예교수·경제학 kwumin@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