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사 '콕 찌르기'] 후추는 1000년 이상 금보다 비싼 향신료…냉장·냉동 기술이 발달하면서 가격 추락
후추는 금(金)보다 비싼 물건이었습니다. 과장이 아닙니다. 비유도 아닙니다. 1000년이 넘도록, 같은 무게의 후추와 금 가운데 후추 가격이 더 높았습니다. 혹시 다른 물건이냐고요?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후추, 우리가 아는 그 금이 맞습니다. 전통적으로 육류는 인류에게 중요한 영양 공급원이었습니다. 문제는 고기 보관이 쉽지 않다는 점이지요. 신선한 육류를 먹는다는 것은 그래서 과거 사람들에겐 평생 동안 몇 번 없는 호사였습니다. 아주 특별한 날에 집 바로 옆에서 도축을 해야만 비로소 가능한 일이었으니까요.

고기를 맛있게 먹는 방법

육류 부패를 막고 오래 보관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소금에 절이거나 포로 만드는 것이지요. 당연히 싱싱한 경우보다 맛이 떨어집니다. 유럽에서는 10월쯤 가축을 도축하고, 말하자면 겨울나기 식품으로 저장육을 활용했습니다. 염장하거나 말려서 지하 창고에 보관한 것이지요. 당연히 맛도 밋밋했고 ‘약간의 부패’에 따른 좋지 않은 냄새도 따랐습니다.

이 난점을 단칼에 해결한, 살짝만 첨가해도 저장육의 맛과 향을 몇 단계 업그레이드한 향신료가 후추였습니다. 워낙 비싼 물건이라 귀족들만 섭취할 수 있었고, 서민들은 후추 대신 아쉬운 대로 ‘허브 식물’을 활용했습니다. 금보다 비싸고 휴대가 편리하니, 유럽에서는 후추를 교환 매개로 쓰기도 했습니다. 세금을 낼 때 후추로 현물 납부를 하기도 했고 결혼 지참금, 집세, 무역 거래 결제수단으로도 후추가 널리 쓰였습니다.
[세계문화사 '콕 찌르기'] 후추는 1000년 이상 금보다 비싼 향신료…냉장·냉동 기술이 발달하면서 가격 추락
여담입니다만, 1990년대 초 동유럽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요. 각국의 지폐보다 ‘미국 담배’가 더 환영받는 결제수단이었습니다. 각국 정부의 신용도가 추락하고 인플레이션이 심해 지폐 가치는 예측 불가능이었지만 ‘현물인 담배’가 지니는 가치는 동유럽을 넘어서서 국제적으로 불변이었으니까요. 그 당시 동유럽에서 미국 담배를 피는 것은 그래서 지폐를 태우는 일과 동일한 행동이었습니다. 유럽에서만 후추가 인기였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도 고려시대 문헌부터 후추에 대한 언급이 눈에 띕니다. 조선시대에는 ‘연회장에서 후추를 본 기생들이 다투어 달려들었다’는 기록도 보입니다. 그만큼 후추는 귀한 물건이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후추의 별명이 ‘검은 황금’인 이유입니다.

후추 가치는 왜 떨어졌나

그런데 왜 후추 가격이, 문명사적 중요성이 갑자기 떨어지고 줄어든 것일까요? 후추가 더 이상 생활에 필요한 절대적인 물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체작물이 나와서가 아닙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후추 가치를 떨어뜨렸습니다. ‘냉동 기술’입니다. 식품의 냉장냉동 보관이 가능해지면서 후추의 효용은 빠르게 줄어들었습니다. 필수품이 아니라 기호품이 돼 버린 것이지요. 경기규칙이 바뀌거나 아예 경기종목 자체가 달라진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패러다임 체인지(paradigm change)’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 절대적이고 영원 불변인 것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규칙이나 진리도 세월이 흐르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주산(珠算)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지금은 ‘어린이 지능 개발에 도움이 되는 숫자 계산법’ 정도의 기술이지만, 198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주산은 국가가 관리하는 주요 기능이었습니다. 각급 학교, 특히 상업학교의 필수 교과목이었고 문교부와 대한상공회의소가 공인하는 1~7급의 엄정한 검정시험이 치러졌습니다. 입사 시험 때 주산 자격증이 당락의 주요한 기준이었고, 주산 고수들은 직장에서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았습니다.

요즘 프로야구 투수처럼 팔을 보호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주산을 놓는 손’으로는 가방도 들지 않고, 손톱도 다듬이칼로 살짝살짝 섬세하게 문지르고 온갖 정성을 다했던 것이지요. 휴대용 전자계산기가 발명되면서 주산의 전성기는 급격하게 막을 내렸습니다. 사회적 중요도가 하락하기는 했어도 주산은 어쨌거나 살아남았습니다. 하지만, ‘필경사(筆耕士)’라는 직종과 그 분들이 사용하던 유인물(油印物) 제작기는 아예 자취를 감췄습니다.

기술에 따라 사라지는 직업들

1960년대 요코하마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일본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 ‘고쿠리코 언덕에서’(2011)를 보셨나요? 그 작품에서 고등학생들이 문예지를 만들 때 쓰는 기구가 유인물 제작기, 일명 ‘가리방’입니다. 철판 위에 기름 종이를 놓고 철필로 글자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고, 완성 후 그 아래에 종이를 대고 잉크를 묻힌 롤러로 밀면 ‘철필로 긁어낸’ 곳에만 잉크가 묻는, 수작업 인쇄방식입니다. 초중고 학교마다 시험지, 가정 통신문을 인쇄하는 필경사가 꼭 있었고, 시중에 유인물 가게가 번성했지요. 나름대로 전문 인력으로 평가받던 필경사는 복사기의 보급과 발명으로 문서 작성의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존재 의미를 잃었습니다.

알아보기 어려운 육필원고 손글씨를 가독성(可讀性) 있게 바꿔주던 타이피스트도 예전에는 법원(法院)의 필수 정규인력이었습니다. 판사들이 판결문을 컴퓨터로 작성하면서 자연스레 사라진 직종입니다. 그렇다면 미래에는 어떤 직종이 살아남거나 생겨날까요? 변화의 방향을 예측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일일까요? 다음 회에는 그 이야기를 한 번 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