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격 낮은 대중문화 넘쳐나는 건 인간사회의 한 단면에 불과…자본주의 도입 후 예술가 대거 등장
자본주의가 ‘천박한 물질주의’를 조장한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많다. 자본주의가 사람들로 하여금 고차원적이고 고상한 것보다는 감각적이고 쾌락적인 것만을 추구하게 하고, 물질적으로는 풍요롭게 하지만 사람들의 영혼과 정신은 파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술이 쇠퇴하고 허접스럽고 천박한 대중문화가 판을 친다는 것이다.

그것은 정말 오해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저질 출판물이나 영화, 포르노와 같은 천박한 대중문화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한 단면에 불과할 뿐이다. 오히려 자본주의가 도입되고 발전하면서 예술이 더 발달했으며 많은 사람이 고상한 문화를 더욱 즐기게 됐다.

품격 낮은 대중문화 넘쳐나는 건 인간사회의 한 단면에 불과…자본주의 도입 후 예술가 대거 등장
인간의 삶에서 먹고 마시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고상한 정신적인 욕구가 있다. 그런 정신적인 욕구도 물질적인 토대가 있어야 쉽게 충족시킬 수 있다.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하는 생활환경에서는 정신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고 문화를 창조해갈 수 없다. 물론 수도승처럼 모든 물질적인 것을 벗어나 완전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런 생활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물질적인 생활조건을 개선하려고 노력한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물질적인 면만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아니다. 먹고 마시는 것에 중점을 두는 그런 생활은 그야말로 권태롭고 공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권태로움과 공허함에서 벗어나고자 음악 미술 문학 등의 예술활동을 하며 즐겼다. 이런 과정에서 사회 분업의 결과로 음악가 미술가 문학가라는 새로운 직업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이런 예술 행위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남다른 재주였고 다른 직업을 가지면서 수양이나 취미로 한 것이었지 직업이 아니었다.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재주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런 사람들조차 대부분은 자본주의 이전 시대에는 학문과 예술을 좋아하는 왕이나 귀족과 같이 부유한 사람들의 후원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다가 자본주의가 도입되고 인류의 생활 형편이 나아진 이후에 정신적인 문화가 꽃피우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와 조각가들, 바그너 베를리오즈 비제 브람스 슈만 등과 같은 음악가들, 발자크 모파상 프루스트 위고 예이츠 등의 문학가들이 대거 등장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자유가 많아졌고 예술가들은 그 자유를 만끽했다. 과거와는 달리 오늘날 예술가들은 단 한 명의 후원자나 고객에게 의존하지 않고 대중을 상대로 창의적인 활동을 하며 생활할 수 있게 됐다.

더 중요한 사실은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과거 귀족만 누릴 수 있던 고상하지만 값비싼 문화를 더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의 수많은 사람이 비디오, CD, DVD, 컴퓨터 동영상을 통해 엘리자베스 시대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더 쉽게 관람할 수 있고, 고전음악 작곡가가 살았던 동시대 사람들보다 더 쉽게 고전음악에 접근할 수 있으며, 더 많은 사람이 바그너의 오페라를 감상할 수 있게 됐다. 또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새로운 예술 형태가 창조돼 누구나 즐길 수 있다.

자본주의가 천박한 물질주의를 조장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자유로운 경제체제와 그 안의 사람들이 행하는 선택을 혼동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사람들이 상품과 서비스를 자유롭게 교환할 수 있는 경제시스템을 말한다. 이 시스템하에서 자유로운 교환에 의해 개별적인 욕구가 표출된다. 이런 특징을 지닌 자유 시장은 사람들의 욕망에 대해 응답할 뿐이다. 사람들의 욕망이 타락하면 자유 시장은 타락을 공급하고, 우리의 욕망이 고상하게 승화하면 승화된 고상함을 공급한다. 자본주의는 많은 사람에게 수많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 그러나 일반 대중이 언제나 고상한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다. 타락한 기업들이 저질 출판물이나 영화, 포르노로 소비자를 유혹할 수 있고 또 이에 대한 욕망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구입할 수 있다. 그런 선택을 자본주의 탓이라고 하는 것은 엉뚱한 곳에 대고 비난하는 꼴이다.

그뿐만 아니라 천박한 문화에 대해서 자본주의를 탓하는 것은 결국에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자유를 탓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그렇다면 천박한 물질주의에서 벗어나 고상한 문화를 이루는 길은 국가가 나서서 사람들에게 주어진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가 국민의 자유를 통제했을 때 사람들이 더 고차원적이고 고상한 선택을 한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사회주의와 국가주의 나라에서 오히려 낙태와 알코올 중독이 더 만연했고, 가족의 붕괴가 더 많았던 사실이 이를 말해 준다.

인간 사회는 불완전하다.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든, 사회주의 사회든, 국가주의 사회든 모두 그렇다. 인간 자체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또 선한 사람, 악한 사람 등 인간의 종류도 다양하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쁜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천박한 물질주의 문화가 형성되기도 한다. 그러나 ‘천박함’은 자본주의만의 문제는 아니다. 어느 사회나 존재한다.

그리고 사회주의나 국가주의와 같은 사회에서 더 물질주의를 추구한다. 그것은 경제목표와 경제계획을 성취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던 데서 알 수 있다. 오히려 그런 사회에서 비물질적이고 정신적인 것들이 더 많이 파괴됐다. 누구든지 발명하고, 누구든지 발견하고, 누구든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문화가 훨씬 더 발달했다.

안재욱 < 경희대 경제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