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영어공부에 묶인 이공계 예비박사들
대한민국 국민에게 영어는 참으로 고통스런 존재다. 제1의 국제어로 확고하게 자리 잡은 영어이기에 그 중요성엔 모두가 공감해서 이를 초등학생 때부터 가르친 지가 벌써 20여년이나 됐다. 그러나 그런 조기 교육을 받은 30대 성인 대부분이 간단한 영어 대화조차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90% 이상 국민은 외국인과의 대화 필요성을 1년에 겨우 한두 번 정도 느낄 것이다. 결국 모든 국민의 영어 회화 능력을 문제 삼을 필요는 전혀 없는 것이다. 영어를 못한다고 스트레스 받을 일도 아니다. 영어를 잘해야 할 사람은 외국인과 직접 부딪히면서 일하거나 영어 문서를 읽어야 하는, 기껏해야 10% 정도의 국민이면 충분할 것이다. 어쩌면 그보다 더 적어도 괜찮을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가 국민 모두에게 고통인 이유는 이상하게도 우리 사회에선 영어 능력을 한 개인이 지니고 있는 전체적인 지적(知的) 능력의 바로미터로 여기기 때문이다. 전혀 믿기지 않지만 부드러운 영어 발음을 위해 아이들의 혀 수술도 불사한다는 학부모들의 비이성적인 행태는 무엇에 기인할까. 지난해 영어 사교육시장이 15조원 규모라 하니 이는 필자가 속한 포스텍 같은 이공계 연구중심대학을 50~60개 정도 운영할 수 있는 큰 금액이다. 이런 과도한 사교육은 결국 영어를 잘하면 사회에서 더욱 경쟁력 있는 존재로 인정받기 때문일 텐데 이는 참으로 불행하며 비합리적인 일이다.

UN과 같은 국제 조직에서 일할 사람이 아닌 대한민국 국민을 위해 일할 우리 공무원을 뽑는 시험에서 당락을 결정하는 핵심 과목은 무엇일까. 지난해 4월 실시한 9급 국가공무원 공채시험에 응시한 2000여명에 대한 의견조사 결과 가장 어려웠던 과목은 국어도 한국사도 행정학도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80%에 이르는 응시자가 영어 과목이 가장 어려웠다고 응답했으니, 결국 우리는 영어 시험 결과로 공무원을 선발하는 셈이다. 대한민국 살림의 최전선에서 우리 국민들과 대면하며 서비스하는 것이 주요 업무인 공무원들을 왜 영어 성적으로 선발하나? 이들이 업무에서 만나게 될 외국인은 1년에 몇 명이나 될까.

대학의 과학기술 연구활동에서 박사과정 학생들은 꽃봉오리 같은 존재다. 이들은 교수와 함께 연구하면서 지도를 받지만 종종 참신한 아이디어로 새로운 학문의 길을 열기도 한다. 그런데 남학생들에게 병역은 당연한 의무이며 또 대부분은 박사과정을 마칠 때까지 병역을 연기할 수도 없다. 결국은 한창 물이 오르고 있는 꽃봉오리도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기에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전문연구요원 제도가 운영되고 있다. 박사과정 이수 자체로 병역 의무를 대신해 과학기술과 학문 발전에 더욱 기여하라는 취지로 생긴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전문연구요원은 전국적으로 매년 600명 안팎만 선발하기에 이공계 대학 박사과정 학생 서너 명 중 한 명 정도만이 합격하는 것이 현실이다. 경쟁이 있으니 당락을 결정해야 하는 일은 어쩔 수 없지만, 문제는 이 역시 영어 점수에 의존하기에 학생들이 연구는 뒷전으로 미루고 영어 공부에 몰입한다는 것이다. 영어를 위해 연구를 단절하는 박사과정 학생들이 급속히 많아지고 있는 것이 우리 이공계 대학의 아쉽고도 어처구니없는 현실이다.

어느 경우든 영어를 잣대로 사람을 선발하는 일은 이제 우리 사회 전체가 다시 고려했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대학 입학 시험인데, 한국에서는 물리학에 아인슈타인 같은 능력을 지녔어도 영어를 못하면 괜찮은 대학으로의 진학은 꿈도 못 꿀 일이다. 만일 대입 전형에서 영어 비중이 대폭 낮아진다면, 혹은 아예 영어 시험을 없앤다면 오히려 초·중등학교에서는 살아 있는 말로서의 영어 교육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어는 한낱 의사 소통의 수단이지 한 개인의 능력을 평가할 수 있는 도구는 전혀 아니다. 영어를 잘해야 능력 있는 사람이란 미신에서 벗어나자.

김도연 < 포스텍 총장 dohyeonkim@postech.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