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야학, 젊은 시절의 기억
대학생 시절, 1973년부터 군대에 가기 전까지 서울 신정동에서 ‘신정학원’이란 야학을 세워 아이들을 가르쳤다. 당시 신정동은 청계천 개발 계획에 따라 집이 철거돼 다른 곳으로 이사해야만 했던 청계천 일대 주민이 많이 모여들던 곳이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생활이 어려워 움막을 짓고 살았다. 야학에 찾아온 학생 중에도 청계천에서 살다 온 사람들의 자녀가 많았다.

필자와 함께 야학을 운영하던 사람은 지금의 아내와 친한 선배 두 명이었다. 우리 넷은 중고 텐트를 사서 교실을 꾸렸다. 개인 돈을 조금씩 모아 겨우 전기를 들였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교실이었지만, 학생들을 위한 따뜻한 보금자리였다. 수업은 오후 5시부터 10시까지였다. 수업이 끝나면 대학생 교사들이 모여 교재를 만들거나, 광범위한 주제를 놓고 밤새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신정동에서 살던 청계천 쪽 출신 주민들에겐 하루가 생존 자체를 위한 전쟁이었다. “먹고 살기가 힘들다”는 표현조차 우아하게 들릴 정도였다. 부모들로선 자녀 교육에 신경 쓸 여력이 없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하루는 한 학부모가 낫 한 자루를 쥐고 야학 교실에 찾아와 교사들에게 항의했다. 내용인즉슨 “공장에서 일하면 돈을 벌 수 있는데 돈도 안 되는 공부를 시킨다”는 것이었다. 기가 막힌 말이었지만, 우린 그 부모를 한참 동안 설득했다.

필자는 그때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뼈저리게 실감했다. 또 아이들에게 뭔가 가르칠 땐 “내가 갖고 있는 사상을 주입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교육 외의 목적을 갖고 수업을 진행하면 학생들의 마음은 닫혔다. 도리어 학생들이 공부의 동기를 찾는 데 실패하는 걸 목격했다. 아이들이 알고 싶어 하는 건 대학생의 정치적, 사상적 고민이 아니었으니까.

야학 수업은 계속됐다. 그때 우리에게 배운 야학 학생 중에선 학계나 법조계에 진출해 이른바 ‘잘나가는 인물’이 된 경우도 있다. 필자 나름대로 사회에 기여했다는 뿌듯함도 느낀다.

야학 교실에 앉아 있던 아이들의 형형한 눈빛만큼은 잊을 수 없다. 짧지만 야학에서 선생 노릇을 했던 필자에겐 그 눈빛이 매우 특별하게 느껴진다. 저마다 다른 삶과 생각들이 세상을 다채롭게 이룰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고 믿기 때문에.

김한 < JB금융그룹 회장 chairman@jbf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