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과시가 능력으로 여겨지는, 이른바 ‘빅 미(Big me)’의 시대다. 페이스북에는 ‘얼마나 잘살고 있는지’ 보여주는 게시물이 경쟁하듯 올라온다. 경치가 아름다운 해외 휴가지, 지인들과의 근사한 저녁식사, 참가한 유명 콘퍼런스의 행사장 풍경 등…. 자기성찰과 절제는 이미 오래전 잊혀진 미덕이다. 애써 그 대열에 동참해 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깊은 헛헛함이다. 손미나 손미나앤컴퍼니 대표도 10여년 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공중파 방송사 아나운서로 이름이 알려졌을 때였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의 화려한 삶을 부러워했지만 스스로 만족하지 못했다. 2004년 휴직을 하고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떠나 언론학 석사과정을 밟았던 이유다. 3년 뒤에는 아예 사표를 내고 여행작가로 변신했다.

그가 허핑턴포스트코리아 편집장을 거쳐 ‘인문학 전도사’로 돌아왔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On love)》등의 소설로 국내에서도 사랑받는 세계적 작가 알랭 드 보통의 ‘인생학교’를 지난해 10월 한국에 세우면서다. 인생학교는 알랭 드 보통이 2008년 영국 런던을 시작으로 프랑스 파리,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등 세계 10곳에 세운 인문학 교육기관이다. 서울 이태원동 ‘인생학교 서울’에서 손 대표를 만났다. 강의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人사이드 人터뷰] 손미나 "사랑을 오래 유지하는 법, 가슴 뛰는 직업 찾는 법, 선택 잘 하는 법 함께 고민해 볼래요?"
“감성지능 키울 기회 적은 현대인”

인생학교 강의 타이틀은 하나같이 특이하다. 일에 얽매여 살지 않는 법, 선택 잘하는 법, 가슴 뛰는 직업을 찾는 법, 사랑을 오래 유지하는 법…. 이런 것도 강의할 수 있는지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제목들이다. 손 대표는 “일방적 강의가 아니다”고 했다. ‘인생의 질문’을 던지는 이들에게 여러 방법론과 사례를 제시하지만 대안을 찾는 것은 각자의 몫이라는 것이다. 답을 찾는 과정에서 수강생 사이에 활발한 토론이 벌어진다.

손 대표는 “현대인들은 지식은 많이 쌓고 있지만 감성지능(emotional intelligence)을 키울 기회가 극도로 적다”고 지적했다. 알랭 드 보통도 스스로의 감성지능 부족을 절감했다고 한다. 그는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역사학을 전공해 수석으로 졸업하고, 세계적인 작가와 철학가로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아내와 말다툼할 때, 아기를 돌볼 때 서툰 자신에게 당혹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일터에서는 성공해 존경받는 전문가지만 집에서는 소외감을 느끼는 아버지, 기술적으로는 유능하지만 환자와 대화하는 법이 서툴러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의사 등 직업 외의 문제에 ‘서툰’ 사람들의 사례를 들며 손 대표는 말했다.

“바깥에서 방대한 지식을 쌓고 훌륭한 직업인이 되는 것은 ‘사회인’으로서의 역할인데 그걸 ‘인간’으로서의 역할이라 할 수 있을까요? 부모·자식·연인으로 행복해지는 방법,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늙음과 죽음을 대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자리를 만들고 싶었어요.”

인생학교 서울은 연 지 두 달밖에 되지 않지만 강의마다 수강생이 몰리고 있다. 전 연령층을 대상으로 하지만 젊은 층이 많이 찾는다. 20, 30대 사이에서 인생학교가 화제가 되면서 하나의 사회현상으로까지 번지는 분위기다. 최인아 전 제일기획 부사장, 하지현 건국대 의대 교수, 최명화 현대자동차 상무 등이 인생학교 강사로 나서고 있다.

스스로 선택한 삶의 가치

알랭 드 보통이 인생학교를 시작한 2008년 2월 손 대표는 그를 처음 만났다. 국내 한 잡지사에서 의뢰받은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인연을 이어가다가 2012년 정식으로 분교를 공모할 때 도전했다. 알랭 드 보통은 “여러 곳에서 인생학교 서울을 세우고 싶다고 했지만 당신이 가장 마음에 든다”며 그를 파트너로 선택했다.

손 대표는 “재미있게도 지금까지 걸어온 인생 궤적이 인생학교가 추구하는 방향과 맞아떨어진다”고 했다. 그는 “삶의 기로마다 일반적이지 않은 선택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KBS에 사표를 낸 건 그중 하나일 뿐이다. 고려대 서어서문학과 92학번인 그는 대학에 갈 때도 주위의 반대에 부딪혔다.

“‘잘 쓰이지 않는’ 언어를 전공해 뭐하느냐는 얘기였죠. 대학 때 휴학하고 유럽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휴학이 일반적이지 않을 때였거든요. 허핑턴포스트 편집인으로 도전할 때도 의아한 눈길로 보는 사람이 많았죠.”

어린 시절부터 그를 지지해준 사람은 아버지와 어머니다. 손 대표는 “무엇을 하든 늘 믿어준 부모님 덕분에 ‘선택의 자율성’에 대해 일찍부터 깊이 고민할 수 있었던 것 같다”며 “매 순간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머릿속으로 미리 시뮬레이션하는 습관을 길러 왔는데 인생학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같은 내용인 것을 알고 무척 반가웠다”고 했다.

다른 기관에서 제공하는 인문학 수업이나 상담과 다른 점이 뭐냐고 묻자 “같지 않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비슷한 것은 있지만 영국에서 커리큘럼을 짜 세계 각국에 맞게 현지화한 인생학교 같은 기획은 없다”며 “다양한 프로그램이 공존하고,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성찰 없는 삶이 극심한 갈증 초래

언론인 파리드 자카리아는 신간 하버드 학생들은 더이상 인문학을 공부하지 않는다에서 미국에서 빠르게 전공자가 줄어드는 인문학의 위기를 지적했다. 국내외에서 지극히 실용적인 학문이 주목받는 시대다. 손 대표는 프로그래밍 교육 등 정보기술(IT) 실용교육에 철학적 성찰이 밀리는 세태에 대해 “실용학문은 중요하지만, 삶을 돌아보지 않으면 반드시 갈증이 심해져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국내에선 정서적 방황이 두드러진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손 대표는 “현대사회는 극도로 물질주의적이고 속도가 빠르다”며 “모두가 바쁘게 허우적거리지만 근본적인 고민 없이 나아가니 불행함을 느낀다”고 했다.

“교육의 문제도 크다”고 덧붙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부모는 아이가 학교에서 공부할 때도, 운동회에서 달리기를 할 때도, 심지어는 놀 때도 ‘1등 해’라고 한다”고 꼬집었다. 지나친 경쟁과 ‘정답’에 천착하는 교육이 그렇잖아도 다른 나라에 비해 빠르게 경제성장을 이룩했고 지금은 더 빠르게 디지털화하고 있는 한국 사회를 삭막하게 한다는 것이다.

손 대표는 “앞으로 남은 시간을 인생학교에 ‘올인’해도 시간이 모자랄 것 같다”고 했다. 강사를 늘리고 지방으로 학교를 확장한다는 계획은 이미 밝혔다. 기업, 정부 부처와 협력해 영국 본교에서 제공하는 기본 커리큘럼 외에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이날 ‘선택 잘하는 법’ 강사로 나선 그는 수강생들에게 선택과 관련한 과제를 던지고,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공유하기도 했다.

“인생학교라는 단어에는 다시 학생의 마음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어릴 적 학생일 때는 누구나 편안한 마음으로 배우지만, 이제는 더 이상 뭔가를 배우기에는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그렇지 않다는 걸, 아직도 배울 수 있는 게 많다는 걸 알리고 싶어요.”

글=김보영 기자 wing@hankyung.com
사진=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