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끝으로 내몰리고 있는 경제
시급한 법안 처리 내팽개친 국회
입법권 내놔야 할 상황 맞을 수도

이영조 < 경희대 국제대학원 정치경제학 교수 jlee@khu.ac.kr >
[다산칼럼] 해야 할 일 하지 않는 국회

아무리 갑작스러운 사건이나 위기도 돌이켜 보면 조짐이 있게 마련이다. 무능하고 무지해서 그런 징후를 놓치거나, 그보다는 무사안일에 빠져 이를 무시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1997년의 외환위기만해도 그렇다. 이미 많은 예후가 있었고 여러 분야에서 구조조정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성에 젖어 개혁을 미루다 실로 끔찍한 위기를 맞았다.

지금의 우리는 어떤가. 아주 서서히 가열되는 물속에 있는 개구리가 변화를 느끼지 못해 그대로 있다가 마침내는 삶겨 죽는 것처럼 위기를 향해 가고 있지만 변화 자체가 급격하지 않으니까 무사안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엄청나게 빠른 속도의 저출산·고령화, 혁신과는 거리가 먼 경제·사회 시스템, 고갈돼 가는 기업가 정신 등 우리 사회가 구조적으로 서서히 진행되는 중장기 위험에 노출돼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개구리가 물이 서서히 데워지는 것을 간과하다 죽음을 맞듯이 우리 경제도 이 같은 구조적 문제를 등한시하다가는 헤어나올 수 없는 위기에 빠질 수 있다.

정부가 4대 구조개혁을 들고 나온 것은 바로 이런 위기 상황을 인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노동개혁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한국의 청년들은 지금 40~50%가 비정규직으로 떠돌고 그 결과 결혼을 늦추거나 포기하는 것이 저출산의 근본 원인이 되고 있다. 아버지뻘 근로자가 임금피크제를 받으면 대졸 아들딸 두 명의 좋은 일자리가 생긴다. 최소한 무능하거나 나태한 노동자는 해고할 수 있어야 좀 더 유능하고 부지런한 사람이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 인력난이 심각한 용접, 금형, 주물 등의 산업에 근로자 파견을 허용하면 최대 1만3000개의 신규 일자리가 창출돼 중장년의 재취업을 도울 수 있다. 기간제 근로자의 사용기간을 2년 더 연장하는 것도 이들의 대부분이 원하고 있는 사항이다.

하지만 노·사·정 타협 정신은 실종된 지 오래다. 노동개혁 관련 5개 법안은 심의도 되지 않고 있다. 먼지만 쌓이고 있기는 다른 많은 민생법안들도 마찬가지다. 이른바 국회선진화법 때문에 여야가 합의하지 않으면 어떤 법안도 통과될 수 없는 현실에서 야당은 법안 처리보다는 내부 분열을 봉합하는 데 더 골몰하고 있다. 법안 심사에 나서는 경우에도 전혀 관련이 없는 법안을 끼워 넣으려고만 든다.

민생법안들이 처리되지 않자 청와대가 임시국회에서 의장이 직권상정을 해서라도 이를 처리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정의화 국회의장은 현재 상황을 경제 비상사태라고 보기 어렵다면서 직권상정을 사실상 거부했다. 심사기간 지정(직권상정)을 규정한 국회법 85조의 자구만을 고려하면 그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회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비상사태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선거구 획정을 위한 공직선거법 개정이 미뤄지는 것에 대해서는 입법 비상상태이기 때문에 직권상정도 고려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위기로 치닫고 있는 상황인데도 위기가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것인가.

지난 10월13일 이제껏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이탈리아 상원이 의원 정수를 315명에서 100명으로 줄이는 한편 정부퇴출권을 포기하고 입법권의 대부분을 내놓기로 의결했다. 당연히 여론에 떠밀려 선택한 ‘정치적 자살’이었다. 2014년도 ‘세계가치조사(World Value Survey)’에 따르면 우리 국민들의 국회와 정당에 대한 신뢰도는 10%대에 머물고 있다. 이는 일본의 절반, 미국의 3분의 1 수준이다. 더 심한 조사결과도 있다. 2012년 사회통합위원회가 각 기관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도를 조사한 것에 따르면 국회는 조사 대상 기관 가운데 가장 낮은 5%를 기록했다. 국회가 할 일을 하지 않는다면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것 같은 일이 한국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이영조 < 경희대 국제대학원 정치경제학 교수 jlee@khu.ac.kr >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