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와 정부가 한·중 FTA 피해대책으로 마련키로 한 1조원 규모의 농어촌상생협력기금 논란이 불거지자 정치권은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모양새다. 일부 국회의원은 정부가 제시한 대안인 만큼 정부에 책임을 묻겠다고도 한다. 한껏 기업을 두들겼다가 이제 와서 책임을 회피하겠다는 것이다. 법에도 없는 비용을, 자율이라는 이름으로, 그것도 강제로 뜯는 것은 조직폭력배들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미국의 맨슈어 올슨 교수는 국가의 조세를 조폭들의 자릿세에 비유하는 이론을 개발했지만 지금 한국에서의 자릿세는 법에도 없는 것이다. 한국 국회의 구조적 포퓰리즘이 날이 갈수록 심화돼 기어이 ‘에바 페론’ 수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지난해 기업들이 부담한 준조세(사회보험료 포함)는 모두 44조6708억원에 달해 법인세(42조6503억원) 납부액보다 많았다고 한다. 이는 한국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수준을 보여주는 충격적인 수치다. 이런 수준이라면 ‘조폭국가’라는 개념을 채용한 올슨 교수도 고개를 돌려야 할 지경이다. 무엇보다 국가 조세제도의 근간이 흔들린다는 게 큰 문제다. 여야가 제멋대로 10년간 1조원이라는 엄청난 돈을 자발적(?)으로 내도록 명령하는 일이 백주에 벌어진 것이다. 국회의원들은 이미 이런 일에는 익숙하다는 표정들이다. 하기야 대통령까지 청년펀드를 만든다는 명분을 내세워 기업 오너들에게 거액의 준조세를 갹출하도록 ‘은근히 강제하는’ 상황이다.

법률의 근거 없이 국가가 세금을 부과·징수할 수 없다는 조세법률주의는 소위 의회주의의 제1 준칙이다. ‘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말이 이를 잘 말해준다.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닌 국회의원들이 바로 그 징벌과 강탈을 명령하고 나섰다. 의원 뱃지는 조폭영화에나 등장하는, 그런 갈취나 폭력의 면허증이 절대 아니다. 물론 이런 종류의 강제는 입법 절차를 거친다고 정당화되는 것도 아니다. 국가가 국민에게 금전을 할당하는 식이라면 이는 원천무효인 처분적 법률에 지나지 않는다. 국회의원들도 그 정도는 알았기에 차마 법으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준조세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