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디턴의 성장론, 반박할 수 없는 현실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앵거스 디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의 역작 《위대한 탈출》(한경BP 펴냄) 한국어판이 지난 26일 재출간됐다. 번역과정에서 일부 논란이 된 부분을 수정·보완했는데 내용은 달라진 게 없다.

디턴은 “경제성장이 가장 확실하고 지속적인 빈곤대책”이라고 갈파하고 있다. 인류는 산업혁명 후 250여년간 비약적인 경제성장으로 소득이 늘고 기대수명이 길어져 삶의 질이 크게 개선되는 ‘대탈출’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경제성장에는 설비·사회간접자본·교육·지식·연구개발에 대한 투자, 혁신적인 기업인, 올바른 제도, 엄정한 법치, 높지 않은 세율 등이 중요하며 이런 조건을 동시에 갖출 때 지속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고 삶의 질이 개선된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지향하고 있는 정책들이다. 대탈출 원동력은 빈곤과 질병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와 예방백신 발명 등 지식의 발전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19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할 때 1인당 소득이 미얀마의 45% 수준밖에 되지 않던 세계 최빈국이 ‘한번 잘살아 보자’는 대탈출에 대한 욕구과 의지로 뭉쳐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은 4060배, 1인당 국민소득은 311배나 증가한 ‘한강의 기적’을 달성한 한국 경제 발전사야말로 자랑스러운 ‘디턴의 대탈출’ 스토리다.

두 번째 중요한 주장은 한 국가 내 불평등은 성장이 둔화되면 악화된다는 주장이다. 미국은 2차 대전 후 1970년대 초반까지는 높은 성장으로 불평등이 개선됐으나 그 후 성장이 둔화되면서 불평등이 심화됐다는 것이다. 한국도 1962~1991년 중 연평균 9.7%의 세계경제발전사에 유례없는 장기고성장 덕분에 분배가 개선됐다. 그러나 노동자 대투쟁이 있었던 ‘87년 체제’ 이후 1988년부터 6년간 임금이 연평균 20%나 오르고 강성노조가 등장하면서 기업 해외탈출이 러시를 이뤄 1992년을 전환점으로 2011년까지 연평균 5.4%의 중성장기로 주저앉고 2012년부터는 2~3%대 저성장기로 추락했다. 그 결과 1992년부터 지니계수 악화, 중산층 몰락 등 분배가 악화됐다. 성장이 낮아지면 단순근로 일자리가 먼저 줄어들고 비정규직과 영세자영업자가 늘어나 분배가 악화되기 때문이다.

세 번째 중요한 주장은 대탈출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는 국가들에 대한 원조가 효과도 없고 오히려 근로의욕과 성장을 저해해 빈곤을 영속화시키고 심지어 원조가 독재정권 유지에 이용돼 민주주의마저 후퇴시킨다는 것이다. 좋은 제도를 갖추도록 조언하고 무역을 자유화해 이들 국가의 생산품이 교역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 기준 몇 배나 많은 원조를 받은 아프리카국가들은 여전히 빈곤한데 중국과 인도는 지난 20~30년간 외국인투자 증가로 비약적인 성장을 하면서 수억 명이 빈곤과 질병으로부터 탈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조보다는 개혁·개방 등 투자환경 개선이 더 효과적이고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한 국가 내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근로의욕을 떨어뜨리고 재정만 축내는 시혜적 복지보다는 제도개선으로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효과적이고 바람직하다. 집권을 위한 포퓰리즘은 원조를 집권에 이용하는 후진국 독재자들처럼 빈곤을 영속화하고 민주주의를 훼손할 수도 있다.

한국은 성장을 반등시켜 선진국으로 도약하느냐 이대로 주저앉느냐의 기로에서 좌우이념 대립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다. 추락하는 성장률을 반등시켜 일자리를 창출함으로써 불평등을 개선하고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구조개혁, 규제혁파로 투자를 활성화하는 등 성장동력 확충에 진력해야 한다. 과도한 복지에 의존하기보다는 ‘다시 한 번 잘살아 보자’는 자립·자조의 대탈출 의지가 중요하다.

오정근 < 건국대 특임교수·한국경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