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개봉한 영화 ‘007 스펙터’에서 악당 힝크스의 차로 등장한 재규어의 슈퍼카 C-X75.
지난 11일 개봉한 영화 ‘007 스펙터’에서 악당 힝크스의 차로 등장한 재규어의 슈퍼카 C-X75.
액션영화를 보면 어김없이 추격 장면이 나온다. 이때 종종 주인공보다 더 주목받는 존재가 있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를 태우고 달리는 자동차다. 주인공 못지않은 인기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이 때문에 자동차 회사들은 어느 영화에 어떤 차를 등장시킬지 고민을 거듭한다.

◆영화만을 위한 한정판 생산

자동차 회사들은 명화에 캐스팅되기 위해 한정판을 내놓는다. 지난 50년간 007시리즈에서 변함없이 본드카로 명성을 이어오고 있는 애스턴 마틴이 대표적 사례다. 애스턴 마틴은 지난 11일 국내에서 개봉한 ‘007 스펙터’에 DB10을 본드카로 내세웠다. 애스턴 마틴은 이 영화를 위해 DB10을 10대만 생산했다. 8대는 영화 촬영에 쓰고 2대는 자선 경매에 내놓는다. 블룸버그는 이 차 가격을 50만달러(약 5억8000만원)로 추정했다.
대사 하나 없이, 가장 빛나는 조연 '車 배우'
본드카 애스턴 마틴에 맞서는 차량은 재규어 C-X75. 영화에서 악당 힝크스가 운전하는 이 차는 재규어가 2010년에 창립 7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파리 모터쇼에 처음 선보인 하이브리드 슈퍼카다. 1.6L 4기통 엔진과 전기모터로 최고 850마력의 힘을 내는 작은 거인급이지만 당시 글로벌 금융위기로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다. 개발만 해놓은 프로토타입 5대만 있었으나 이번 영화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영화 속에선 한 대의 C-X75가 로마의 밤거리를 질주하지만 완벽한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실제론 7대가 출연했다. 출시될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2010년 생산 계획을 세웠을 당시 이 차의 가격은 12억원 이상이었다.

재규어랜드로버는 007 스펙터에 물량 공세를 펼쳤다. C-X75 외에 랜드로버 차량 중 가장 빠른 레인지로버 스포츠 SVR과 랜드로버 디펜더 빅풋을 조연으로 넣었다. 이달부터 국내에 판매되기 시작한 레인지로버 스포츠 SVR의 가격은 1억7980만원이다. 디펜더 빅풋의 후속모델인 디스커버리 스포츠는 한국에서 5960만~6660만원에 팔린다.

◆오래가는 시리즈 영화가 최고

자동차 회사가 가장 선호하는 영화는 시리즈물. 단 한 편으로 끝나는 영화보다 속편은 기본이고 3편, 4편 이상 나올 수 있는 대작을 좋아한다. 흥행을 보장받는 영화에 오랫동안 자동차를 출연시킬 수 있어서다. 10년 가까이 오래 두고 타는 자동차 특성과도 딱 맞아 떨어진다. 또 3~4년에 한 번씩 부분변경(페이스 리프트)이나 완전변경(풀 체인지)을 통해 새 모습으로 바뀌는 자동차의 변신 시기와 영화 신편 제작 주기도 거의 일치한다.

제너럴모터스(GM)는 트랜스포머 시리즈를 선택했다. 2007년부터 작년까지 네 편의 트랜스포머 시리즈에 ‘범블비’로 유명한 쉐보레 스포츠카 카마로와 말리부, 아베오, 스파크 등을 출연시켰다. 이 영화가 인기를 얻자 국내에 스파크 트랜스포머 에디션을 내놓기도 했다.

아우디는 ‘아이언맨 카’로 활동하고 있다. 총 세 편의 아이언맨 시리즈에 고성능 스포츠카인 R8을 내세웠다. R8과 R8 스파이더, R8 e-트론 등이 아이언맨 카로 쓰였다. R8은 지난 4월 국내에서 개봉한 ‘어벤져스2’에도 모습을 나타냈다. 속편 영화에 등장한 차량답게 R8의 2세대 모델이 캐스팅됐다. 올해 제네바모터쇼에 처음 공개된 이 차량은 10기통 엔진으로 최고 610마력의 힘을 낸다. 1세대 모델보다 몸무게를 50㎏ 빼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까지 가는 시간을 3.2초로 단축시켰다. 아우디 A8과 S8은 2005년부터 트랜스포터 시리즈에 출연하고 있다.

BMW는 ‘미션임파서블’을 파트너로 골랐다. 2011년 개봉한 ‘미션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에 플러그인하이브리드 스포츠카인 i8을 선보였다. 올여름 국내에서 상영한 다섯 번째 시리즈 ‘미션임파서블: 로그네이션’에선 고성능차인 M3와 플러그인하이브리드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인 X5 e드라이브 등을 내놨다.
영화 ‘쥬라기공원’에 20년째 출연 중인 메르세데스벤츠.
영화 ‘쥬라기공원’에 20년째 출연 중인 메르세데스벤츠.
메르세데스벤츠는 20년 가까이 ‘쥬라기공원’과 호흡을 맞추고 있다. 1997년에 M클래스가 출연했고, 올 6월 개봉한 ‘쥬라기월드’엔 GLE 쿠페가 합류했다. 쥬라기월드 총 책임자인 여주인공 클레어가 GLE 쿠페를 타고 초원 속 오프로드를 달렸다.

영화 ‘킹스맨’ 속 현대자동차 i40.
영화 ‘킹스맨’ 속 현대자동차 i40.
◆빛나는 조연

시리즈 영화에만 자동차가 등장하는 건 아니다. 필요에 따라 원샷으로 출연하는 경우가 더 많다.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는 경찰차 역할을 자주 맡았다. 현대차 i40와 기아차 스포티지는 2월 국내 개봉작인 영화 ‘킹스맨’에서 경찰차로 나왔다. K5와 스포티지는 2012년 ‘007 스카이폴’에서 경찰차 임무를 수행했다.

2012년에 개봉한 ‘배트맨 다크나이트 라이즈’에선 벤틀리의 아나지가 배트맨 차로 쓰였다. 뮬산의 전 모델인 아나지는 롤스로이스의 팬텀, 메르세데스 마이바흐와 함께 세계 3대 명차로 꼽힌다.

2013년에 개봉한 한국 영화 ‘용의자’에선 폭스바겐의 CC가 추격 장면을 소화했다. 배우 이병헌이 캐스팅돼 화제를 모은 할리우드 영화 ‘레드: 더 레전드’엔 911카레라 GTS 등을 비롯한 포르쉐 군단이 기량을 뽐냈다. 현대차 관계자는 “영화에 등장하는 차량은 대부분 주인공의 성격을 부각하는 용도로 쓰인다”며 “추격 장면이나 결투 장면에선 주인공이 주로 SUV나 고성능 세단을 타고, 성공한 계층의 역할을 맡은 배우는 대부분 고급 세단을 이용한다”고 설명했다.

자동차 캐스팅 조건

(1) 주인공과 잘 어울릴 것
(2) 단편보다 장편 시리즈 선호
(3) 추격신 많은 영화 자주 등장


정인설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