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누가 디턴의 '위대한 탈출'을 왜곡하나
“누구든 죄 없는 자가 있으면 나와 저 여인을 돌로 쳐라”고 말한 사람은 예수였다. 아마 요한복음이지 싶다. 그러나 앞단 즉, ‘죄 없는 자’를 빼고 읽으면 전혀 다른 스토리가 된다. “저 여인을 돌로 쳐라.” 누가? 예수가? 딱하게도 이 글은 이런 유치한 논쟁을 언급하게 될 것 같다.

지난 주말 한겨레신문이 시도한 앵거스 디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보면서 언뜻 떠오른 것이 이런 생각이었다. 참 고약한 주장이었기 때문에 답변도 구차해질 수밖에 없다. 한겨레신문은 디턴의 《위대한 탈출》을 출판한 한경BP와 한국경제신문 주필인 나를 싸잡아 비판하면서 ‘디턴에 대한 대담한 왜곡’이라는 실로 고약한 제목을 붙였다. 이렇게 되면 국어 시험이 필요해진다.

다른 신문에 이름까지 실렸으니 우선은 영광이라고 말해 두어야 하겠다. 개인적으로는 디턴에 대해 실로 놀라운 생각의 일치를 느껴왔던 터였다고 미리부터 고백해 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한겨레신문은 디턴과의 짧은 이메일 인터뷰를 포함한 장문의 기사에도 “불평등은 성장을 질식시킬 수도 있다”는 겁나는 제목을 붙여 놓았다. 한겨레신문은 기사의 첫머리도 “무조건 성장이 좋다는 것은 아니다”고 디턴을 인용했다. 이 문장도 디턴의 본질에 대한 악의적인 왜곡이다. 마치 성장정책을 거부하는 디턴의 단호한 결심처럼 읽힌다. 부분의 진술을 진술의 전부요, 핵심인 것처럼 치환하는 교묘한 편집이다. “세계는 정말 좋아졌어. 그러나 불평등도 여전히 많아.” 이것이 명징한 디턴의 주장이다.

한겨레신문은 이렇게 질문했다. “한경비피와 그 모회사인 한국경제신문, 그리고 자유경제원은 당신의 《위대한 탈출》의 핵심 논지를 불평등은 성장을 촉진시키므로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제시했다. 결국 당신은 한국에서는 성장론자, 불평등옹호론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맙소사. 앞뒤 다 잘라내고 불평등옹호론자라니. 불평등옹호론자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기피 언어다. 한겨레신문은 당신을 불평등옹호론자로 소개한 사람이 있다는 고약한 밀고자적 어법을 앞세워 디턴의 화를 돋우어 볼 참이었을까. 어떻든 질문에 대한 디턴의 답은 이렇다.

“모든 분별 있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는 친성장론자(pro-growth)다. 그러나 무조건 성장이 좋다는 것은 아니다. 불평등은 성장의 부산물일 수도 있고, 성장을 위한 인센티브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성장을 질식시킬 수도 있다. 이런 장단점에 적절한 균형점을 맞춰 주는 것이 사회의 역할이다.”

그런데 다 생략한 채 부분의 진실일 뿐인 ‘불평등은 성장을 질식…’ 운운을 제목으로 뽑았다. 이렇게 되면 디턴은 졸지에 반성장론자가 되고 만다. 참 놀라운 왜곡이다. 좋은 불평등, 다시 말해 불평등이 성장을 촉진한다는 주장은 책 전체에 걸쳐 수도 없이 되풀이되는 핵심 주제다. 물론 불평등의 부정적 측면도 차위의 중요성과 시급성으로 언급된다. 디턴은 다행히 의도된 질문에 말려들지 않았다.

디턴은 지금 다른 사람의 성장론을 반박하면서 “불평등은 성장을 질식시킬 수도 있다”거나 “성장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라면서 반성장론을 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친성장’이라는 자신의 주된 논지를 보완하는 부가적 조건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는 좋아졌다!” 여기에는 다른 해석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가난과 불평등은 여전히 해결돼야 할 문제다. 한겨레신문의 질문을 계속 들어보자. “당신은 미국에서 불평등이 커지는 것에 대해 우려했다. 한국도 다르지 않다. 양극화가 매우 빠르게 진행되고, 가계소득은 정체되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여전히 성장에 목을 매고 있다. 부자와 대기업에 대해 세금을 깎아주는 반면 뒤처진 사람들을 위한 공공지출에는 인색하다. 당신은 이것이 올바른 정책방향이라고 보는가?”

의도하는 답변을 얻어내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 딱해 보일 정도다. 질문에는 교묘하게 의도된 주장과 오류가 혼재돼 있다. 뒤처진 사람을 돕는다는 디턴의 명제를 슬쩍 끼워 넣으면서 한국은 그렇지 않으니 비판을 좀 해달라는 코멘트의 구걸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거리가 멀다. 지금 한국의 공공지출(복지지출)은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 여전히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인색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박근혜 정부는 경제민주화라는 유례를 찾기조차 힘든 반성장주의 구호를 내걸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의 불평등이 미국처럼 극적으로 나쁘지도 않다. 이는 며칠 전 김낙년 교수의 논문에서도 확인되는 그대로다. 디턴이 워런 버핏을 인용하면서 재무적 대량살상무기라고 부른 금융공학도 미국과 한국은 사정이 판이하다. 질문을 받은 디턴이 곤혹스런 입장에 처하게 됐다. 그러나 이렇게 답했다.

“나는 내가 직접 연구하지 않은 나라의 국내 정책에 대해 잘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장의 과실이 널리 공유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것은 먼저 이득을 본 사람이 세금을 내서 뒤처진 사람을 돕는 것을 의미한다.”

질문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태도다. 그렇다면 한국에 대한 디턴의 다른 언급을 기록에서 한번 찾아보자. 그는 작년 이심기 한경 특파원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에서) 사회적으로 분배의 요구가 성장의 욕구보다 커진다면 과거를 돌아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가난했던 과거, 다시 말해 탈출 이전의 상태를 돌아보라는 말이었다. “한국은 아직 더 성장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말 그대로 그는 성장론자인 것이다.

아 참. 다른 연설에서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책에서는 언급을 많이 하지 않았지만 또 다른 좋은 일도 많다. 과거보다 훨씬 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이 있으며 역사를 통틀어 폭력이 대폭 줄었다”고. 디턴의 이런 주장은 세계를 부정적으로만 묘사하려는 좌편향적 사고와는 결코 화해할 수 없다. 《위대한 탈출》에 포함된 수많은 그래프들이 웅변하는 것도 세계는 좋아지고 있다는 분명한 메시지다.

부와 행복은 아무런 상관이 없거나 반대일 수도 있다는 이스털린의 주장에 대한 완곡한 비판도 기억해 둘 만하다. 디턴은 누누이 물질의 충족을 강조하고 있다. 디턴은 앞서 탈출한 사람들의 족적이 나중에 탈출하는 사람들의 모델이 될 것이라는 긍정적 기대를 결코 저버리지 않고 있다. 개도국에 대해서도 원조를 주는 것은 별 효과가 없고 컨설팅을 해주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언급할 정도였다. 이제 디턴의 윤곽이 잡힐지 모르겠다.

디턴이 상위 1%에 주목한 피케티의 학문적 공로를 인정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자신을 피케티와 비교하지 말아달라고 말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피케티와 디턴의 비교나 평가 같은 문제는 제3자의 몫이다. 당사자가 비교하지 말라고 해서 안 하는 것이 아니다. 피케티는 자본주의는 r>g(자본소득률>경제성장률)이므로 필연적으로 불평등을 구조화하고 몰수적 세제를 통해 평등을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디턴은 불평등의 긍정적 측면에 대해서조차 길게 언급했다.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 등 많은 학자들이 디턴과 피케티를 비교하는 글을 쓴 것도 이 때문이다. 디턴과 피케티를 비교한 것을 억지라고 주장하려면 우선 로고프 교수도 동시에 고발해야 마땅하다. 로고프 교수는 “피케티를 읽고 지금의 불평등을 중세나 왕정시대의 강도귀족 수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디턴을 읽고 세계가 그 어느 때보다 평등해졌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고 썼다. 그는 ‘지난 몇 십년 동안 개도국의 수십억명이 극심한 빈곤으로부터 탈출했다는 것’이라고 디턴을 요약했다. 결코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한겨레신문이 자유경제원을 끌어들인 것도 놀라운 일이다. 현진권 자유경제원장이 《위대한 탈출》의 해설을 쓴 것은 출판사 측의 요청이었을 뿐 다른 기획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한겨레는 최근에 일어난 교과서 국정화 문제에 현 원장의 디턴 해설을 연결해서 비판하는 상상력을 발휘했다. 국정교과서 논란은 대한민국 역사를 저주하는 좌편향을 극복하려는 차악의 선택일 것이다. 한겨레야 말로 엉뚱한 공세를 펴야 할 무언가의 필요성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디턴의 《위대한 탈출》을 그가 노벨상을 받기도 전에 국내에 소개한 한경BP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보통의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책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책의 부제와 일부 제목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변형이 있었고, 이것이 ‘억지 시빗거리’가 됐다는 점은 유감이지만 그렇다고 디턴 경제학의 본질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프린스턴대 출판부가 새로운 편집본을 기대하면서 ‘새 에디션과 관련된 문의는 한경BP 측에 해달라’고 요청한 것도 이 때문이다. 디턴의 메시지는 곧 논란의 여지가 없는 새로운 편집본에서 재확인될 것이다. 독자 여러분의 일독을 바란다.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