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은 이제 배부른 소리…'생존'마저 도전이 된 아픈 현실
연 3% 경제성장을 ‘고(高)성장’이라고 말하는 경제관료들이 적지 않다. 과거 저성장으로 여겨지던 연 3% 성장이 이젠 ‘깜짝 실적’이라는 것이다. 한국이 저성장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 수출이 곤두박질치고, 내수 살리기도 요원하다. 성장 하락세를 되돌릴 만한 추동력도 보이지 않는다. 1인당 국민소득은 2006년부터 2만달러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LG경제연구원은 국민소득이 지난해를 고점으로 올해와 내년에 걸쳐 2년 연속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다. 한국의 국민소득은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를 제외하면 줄어든 적이 없다.

20년 시차 두고 일본 따라가는 한국

이러다간 성장가도를 달리다 추락한 일본 그리스 이탈리아의 전철을 밟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독보적 기술력을 바탕으로 세계 경제를 이끌었던 일본은 1990년대 초부터 20년 넘게 장기 침체를 겪고 있다. 일본 정부가 금리를 제로(0) 수준으로 낮추고 재정을 풀었지만 망가진 성장 시스템을 복원하지 못했다. 지지부진한 구조개혁과 급속한 고령화로 경제 활력이 떨어지면서 ‘잃어버린 20년’을 보냈다.

그리스는 포퓰리즘 정책 등을 남발한 데다 무리하게 확장적인 재정 정책을 펴다가 끝내 파산했다. 2009년만 해도 국민소득 3만달러 돌파를 눈앞에 뒀던 국가가 이듬해 국제통화기금(IMF)의 첫 구제금융을 받는 비극을 연출했다. 관광업에만 의존하고 제조업을 방치한 탓에 국가 경쟁력이 바닥났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한때 독일 일본과 함께 세계 경제를 주름잡았던 이탈리아도 빠르게 변화하는 산업 구조에 대응하지 못해 장기 침체에 빠졌다. 연구개발(R&D)을 등한시한 데다 대규모 설비 투자도 제때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경직된 노동시장으로 인해 임금은 빠르게 올라 국제 경쟁력을 잃었다.

이들 세 나라의 실패가 종합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한국의 최근 모습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특히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진입 초기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고 많은 전문가가 말하고 있다. 명목 경제성장률 추이나 총인구 증가율, 고령화 추세, 금리 및 부동산 가격 추이 등 여러 방면에서 일본이 20여년 전 걸어간 길을 되밟고 있다는 게 한국개발연구원(KDI)의 분석이다.

그리스를 파산으로 몰고간 포퓰리즘 정책도 마찬가지다. 우리 국회는 행정부를 압도하는 권력을 바탕으로 복지분야 등에서 포퓰리즘 법안을 남발하고 있다. 빚을 내 확장적인 재정 정책을 편 탓에 내년 국가 채무는 처음으로 국내총생산(GDP)의 40%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 경제를 떠받치던 조선 철강 석유화학 등 주력 제조업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여 거센 구조조정 압력을 받고 있다. 내년부터는 정년 연장까지 예정돼 있다. 그럼에도 노동개혁은 지지부진하다. 저성과자 해고 기준 마련은 법제화가 아니라 정부 지침으로 어물쩍 넘어가는 수준에 머물게 됐다.

구조개혁으로 경쟁력 회복해야

독일은 1990년 통일 이후 ‘유럽의 병자’로 불릴 정도로 경제 활력을 잃었다가 2003년 노동시장 개혁을 골자로 한 ‘하르츠 개혁’으로 부활했다.

재계와 노동계가 참여한 하르츠위원회는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 고용 형태를 다양화하는 방안을 내놨다. 파견·기간제 등 비정규직 규제를 완화하고, 주당 15시간 미만 일하는 ‘미니잡(시간제 일자리)’을 대폭 확대해 눈에 띄는 성과를 이끌어냈다. 3만달러를 넘어섰던 국민소득이 2002년 2만3680달러까지 추락했으나 2007년 4만달러대로 급반등한 배경이다.

강소기업 경쟁력도 선진 경제의 핵심 요소로 꼽힌다. 스위스는 관광산업뿐만 아니라 부품·소재 중소기업을 대거 육성한 덕에 국민소득을 2만달러에서 3만달러로 올리는 데 2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조동철 KDI 거시경제연구부장은 “노동시장이 유연하고 규제가 적은 나라들이 장기 침체에 빠지지 않고 선진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며 “한국 경제의 지속 성장을 위해선 구조 개혁과 규제 완화가 모범 답안”이라고 강조했다.

조진형 기자 u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