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네소타 프로젝트'를 아십니까
1955년 9월15일 서울 여의도 비행장. 미국 미네소타를 향해 출발하는 노스웨스트항공 비행기에 한국의 젊은 의사 12명이 몸을 실었다. 미국 국제협력본부(ICA)의 한국원조 프로그램인 ‘미네소타 프로젝트’ 연수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영어가 서툴러 기내식을 주문하는 것도 힘들었다. 하지만 이들은 전란에 폐허가 된 조국을 생각하며 사명감 하나로 밤낮없이 학업에 매달렸다.

연수가 한창이던 1959년 뉴욕대 부총장을 지낸 조지 스토다드 교수가 한국을 찾았다. 프로젝트를 평가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보고서에 이렇게 썼다. “금속활자나 고려자기 등 여러 예술과 기술 분야에서 그랬듯이 머지않아 한국은 다른 나라에 새로운 상품과 사상을 수출하는 나라가 될 것이다.”

그의 ‘예언’은 수십년이 지나 현실이 됐다. 60년 전 한국의 젊은 의사를 가르쳤던 미국 의사들이 의료기술을 배우기 위해 한국을 찾고 있다.
'미네소타 프로젝트'를 아십니까
○의료 기틀 마련한 미네소타 프로젝트

미네소타 프로젝트는 6·25전쟁 후 미국이 진행한 ‘서울대 재건 프로그램’이다. 1955~1961년 서울대 의과대학, 공과대학, 농과대학 등 3개 단과대학 교직원 226명이 3개월에서 4년 동안 미네소타주립대에서 연수를 받았다. 당시 한국은 간단한 수술도 엄두를 내지 못하던 시기였다. 대장균 플라스크(시험용기)를 가슴에 품어 배양할 정도로 연구 환경도 열악했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한국 의료진은 77명. 이들은 주말에도 쉬지 않고 하루 두세 시간 쪽잠을 자며 학업에 몰입했다. 임상강사(펠로) 역할을 하며 환자를 직접 진찰하고 회진도 같이 돌았다. 기초의학 의료진은 세균과 바이러스 배양법을 익혔다. 팔에서 피를 뽑는 법과 같은 간단한 처치부터 심장 수술 같은 고난이도 수술법까지 배우고 돌아왔다.

홍창의 전 서울대병원 병원장(92), 고(故) 이상돈 전 중앙대 의무부총장, 한국 바이러스 연구의 대가인 이호왕 박사(86) 등이 프로젝트 주역이었다. 미네소타 프로젝트로 박사논문을 쓴 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은 “초기에 핵심적인 리딩 그룹을 키웠고 이들이 배운 시스템이 전국으로 확산됐다”며 “미네소타 프로젝트는 전후 공적개발원조(ODA) 프로그램 중 가장 성공한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의료기술 전수하는 나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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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소타에서 의료기술을 배웠던 한국은 이제 의료강국이 됐다. 지난해 의료기술을 배우기 위해 한국을 찾은 외국인 의사는 1000여명. 한국이 세계 기술을 선도하고 있는 위암, 간이식 등의 분야에선 선진국 의료진의 방문도 줄을 잇고 있다. 미국 피츠버그대, 테네시대 등의 의료진이 수술 기술을 배우러 한국에 왔다.

임종필 서울대병원 홍보팀장은 “미국 유명 암센터인 뉴욕 로스웰파크암센터 종양외과 의사가 위절제 수술법을 배우고 돌아갔다”며 “하버드대 의대 등의 요청으로 위암, 뇌종양 분야 기술을 교류하기 위한 화상회의도 주기적으로 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하버드대 의대 교수가 모친의 위암 수술을 서울대에 의뢰할 정도로 한국 의료기술이 세계적으로 신뢰받고 있다”고 덧붙였다.

최근 5년간 서울대병원 위암센터에 교육을 받으러 온 외국인 의료진은 153명. 이 중 교수급만 100명이 넘는다. 간이식 연수를 위해 서울아산병원을 찾은 의료진은 1000여명에 이른다. 췌장이식은 한국에 의료기술을 전수한 미네소타대학병원을 뛰어넘었다. 아산병원의 췌장이식 환자 1년 생존율은 98%로, 1966년 췌장이식을 처음 시작한 미네소타대학병원(97%)보다 높다.

한국 의료는 해외 진출에서도 성과를 내고 있다. 아랍에미리트(UAE) 등에 진출한 한국 병원은 현지에서 의료 한류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몽골, 라오스, 캄보디아 등에 의료기술을 전수하는 사업도 하고 있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