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투자와 고용, 숫자놀음 안된다
“세상엔 세 가지 거짓말이 있다.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수치다.”

이런 말을 한 사람은 1800년대 말 영국 총리를 지낸 벤저민 디즈레일리다. 정도가 약한 것에서 심한 것의 순서이므로, 정치인인 그에게 통계는 새빨간 거짓말보다 더 지독한 거짓이었다. 여기서 통계수치란 그 자체라기보다는 통계를 빙자한 숫자놀음을 말한다.

숫자놀음이 요즘 재계에서 유행이다. 삼성은 청년 일자리 3만개를 만들겠다는 ‘일자리 종합대책’을 지난 17일 발표했다. 같은 날 LG디스플레이는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기자회견을 열고 2018년까지 10조원을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최태원 회장이 사면받은 SK그룹은 더 통이 컸다. 2020년까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사업에 46조원을 쏟아붓겠다고 밝혔다. 그 전주엔 롯데그룹이 3년간 2만4000명을, 한화도 2017년까지 1만7000명을 고용하겠다고 선언했다.

경쟁적인 ‘통 큰 숫자’ 발표

투자와 고용이 기업을 성장시키고 경제를 살릴지는 논외로 하자. 발표된 숫자만을 따져보면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삼성의 청년일자리 종합대책은 인턴 채용, 소프트웨어 교육, 협력사 채용 지원 등이 골자다. 직접 채용하겠다는 숫자는 정확하지 않다. 보도자료에 ‘삼성전자 반도체 평택단지, 호텔신라 면세점 등 신규 투자를 통해 2017년까지 1만개의 일자리를 창출할 계획’이라고 써놓았다. 하지만 여기엔 간접적인 일자리 창출 효과까지 감안했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LG디스플레이는 지난 3년간 연평균 3조5000억원을 투자해왔다. 앞으로 그만큼 계속 투자하면 2018년까지 10조원은 쓰게 된다.

SK하이닉스가 투자 계획을 내놓은 다음날부터 외국인 투자자들이 주식을 매도해 주가가 급락했다. 지나치게 큰 투자 발표가 나오자 메모리 반도체 업계 내 치킨게임이 재개된 것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국내 한 증권사 관계자는 “SK그룹이 발표한 46조원은 구체적 투입 기간과 내용이 언급되지 않은 선언적 의미가 강하다”며 매도 자제를 권고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정부의 기업 팔 비틀기는 그만

숫자의 신빙성 여부와는 관계없이 LG를 빼고는 모두 ‘이슈’가 있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롯데는 최근 승계를 둘러싼 형제간 갈등으로, 삼성은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와 엘리엇 사태로, SK와 한화는 총수 사면 문제에 각각 관련됐다.

한 기업 관계자는 사석에서 “청와대가 요구하고 부처들이 압박하니 기업이 어쩌겠느냐”고 토로했다. 불황과 중국 기업들의 추격으로 사업에만 집중해도 쉽지 않은 판에 정부 정책에 맞춰 억지 숫자까지 내놓느라 바빴다는 얘기다.

“숫자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거짓말쟁이는 숫자를 이용한다.”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의 독설이다. 중국 정부는 큰소리 내지 않으면서 수백조원을 퍼부어 철강 유화 자동차에 이어 디스플레이 반도체 기업들까지 총력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기업들의 팔을 비트는 일이 벌어진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여전히 많다. 기업이 자발적으로 투자나 고용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보다는 숫자놀음으로 치적을 쌓으려다 보니 진정한 경제 살리기는 요원해 보인다.

김현석 산업부 차장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