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복지파탄' 그리스의 전철을 밟을 텐가
그리스냐 독일이냐. 공무원연금 개혁 논란이 불을 지핀 복지논쟁은 복지제도 개혁의 방향을 고민하게 한다. 1990년대 말부터 세계 각국은 복지 개혁에 전력을 기울여왔다. 재정 건전성을 개선하기 위해서였다. 출산율이 떨어지고 평균 수명이 길어지는 등 인구 구조가 급변했기 때문이다. 정보통신기술(ICT) 혁명과 경제 세계화로 인해 실업률이 높아진 것도 이유였다. 그리스와 독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두 나라의 복지정책 개혁 시도는 상이한 결과를 낳았다.

그리스는 수차례 대규모 복지 개혁을 시도했지만 질적 복지 개혁에는 실패했다. 1990년 총선에서 승리한 신민주주의당(ND) 정부는 큰 변화를 모색했다. 고비용 저효율의 방만한 복지제도가 민간부문의 경쟁력 상실, 공공부문의 비효율성, 만연한 부정부패와 함께 국민 경제를 위협한다는 믿음에서였다. 개혁은 용두사미로 막을 내렸다. 마리아 페트메시두 데모크리터스대 교수의 지적과 같이 구조적 변화가 아니라 일부 수치만 조정하는 ‘모수개혁’에 그쳤다. 2002년 사회당(PASOK) 정권이 주도한 야심찬 연금개혁의 결말도 같았다. 고령화로 인해 연금제도가 벽에 부딪힐 것으로 본 사회당 정권은 영국보험통계분석청(GAD)의 권고에 기반해 연금 수령연령을 대폭 높이려 했다. 소득대체율을 크게 낮추고 자산조사에 근거한 선별지원 원칙을 도입하고자 했다. 그러나 개선은 소폭에 그쳤다. 복지 예산은 계속 늘었지만 실업과 빈곤 문제는 그대로였다. 그 결과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그리스 경제는 유럽의 골칫거리로 전락했다.

독일은 달랐다. 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꿔 혁신을 이뤄냈다. 1998년 들어선 사민당 정부는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복지구조 개선에 성공했다. 의료보험 제도를 손질했을 뿐 아니라 폭스바겐사의 임원 피터 하르츠를 책임자로 영입해 실업복지 제도를 뜯어고쳤다. 개인 책임의 원칙을 도입했다. 복지 수혜자는 혜택을 누리는 조건으로 직업 교육과 같은 책무를 이행토록 했다. 이를 게을리했을 경우 공공노역을 하는 등 무거운 대가를 치르게 했다.

2005년 집권한 기민당 정부도 개혁 기조를 이어갔다. 동독 출신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국가 경쟁력 제고 노력을 안 하고 무분별한 복지 지출을 계속하면 유럽은 공산권 나라들처럼 몰락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독일로 몰려드는 무자격 이민자들에게는 복지 혜택을 엄격히 제한했다.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의무를 하지 않았으므로 혜택도 받을 수 없다는 논리였다. 사민, 기민 양당의 개혁은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복지예산 증가 없이도 실업률을 크게 줄였다. 독일을 유럽의 맹주로 떠오르게 했다.

양국의 사례는 많은 시사점을 준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복지제도는 양적 성장에 치중하느라 질적 개선을 소홀히 했다. 관련 예산은 폭증했지만 정책의 효과는 미미했다. 같은 시기 진행 중이던 선발 복지국가들의 개혁 노력을 반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제 개발의 경우와는 달리 한국만의 창의적인 정책 아이디어를 개발해 적용하지도 못했다. 공무원연금 개혁 협상 과정이 보여주듯 과감한 변화의 필요성에 대한 정치권의 공감대 부족도 중요 요인 중 하나다.

안타까운 일이다. 국민 모두의 소중한 자산인 사회안전망을 유지·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정책 환경의 변화에 한발 앞서 대처할 수 있는 질적 혁신 노력이 절실하다. 적기에 실효성 있는 복지구조 개편에 실패한 그리스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한다. 독일에 버금가는 복지 패러다임의 변화를 일궈내야 한다. 하루속히 관료, 학자, 정치인들이 하나가 돼 제대로 된 복지 개혁이 결실을 보기 바란다.

윤계섭 < 서울대 명예교수·경영학 kesopyun@snu.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