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선발자는 그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자신에게 유리한 룰(rule)을 보편적 진리로 확산시켜왔다. 후발자가 그런 룰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도록 함으로써 헤게모니를 넘보지 못하도록 하자는 의도에서였다. 그럼에도 끝내 선발자를 추월한 후발자가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고유의 통찰력을 갖고 있었다. 15세기 이후 스페인·포르투갈의 중상주의에 대한 영국의 추월, 19세기 영국의 자유무역주의에 대한 독일·미국의 추월,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부활이 그렇다. 소르본 학파의 이른바 ‘헤게모니 가설’이다. 한·중 간 기술 격차가 1.4년으로 나타났다. 미래창조과학부와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이 한국, 미국, 유럽, 일본, 중국 등 5개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2014년도 기술수준평가’에서다.
[뉴스의 맥] 중국의 기술추격? '혁신의 역류'가 우려된다
한·중 간 기술 격차는 2010년 2.5년에서 2012년 1.9년으로 단축된 데 이어 2014년에는 1.4년으로 더욱 좁혀졌다.

문제는 1.4년이라는 기술 격차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이번 조사에서 미국, 유럽, 일본 간 기술격차는 1.1~1.6년으로 분석됐다. 여기서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글로벌 인수합병(M&A)의 대부분은 미국, 유럽, 일본 등 선진권 기업들 사이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기술적 수준이 비슷하고 시너지 효과가 예상될 때 인수합병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중국 기업의 해외 인수합병이 눈부실 정도다. 예상을 뛰어넘는 선진국 기업 인수도 더 이상 낯설지 않다.

한·중 기술 격차도 그런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다. 1.4년이라는 기술 격차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이미 한·중 기업 간 인수합병이 빈번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게다가 한국이 뽑은 180개 국가전략기술에서 우주 등 18개는 중국이 한국을 앞섰고, 2개는 기술 격차가 제로(0), 22개는 기술 격차가 1년 이내인 초박빙이었다. 이쯤 되면 중국이 한국의 기술을 추격한다는 논리가 더는 유효하지 않다.

中기업 혁신과 해외 M&A 러시

더 중요한 것은 기술 격차가 일정범위 내로 들어오면 누가 혁신에 앞설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리버스 이노베이션(reverse innovation)’만 해도 그렇다. 비제이 고빈다라잔 미국 다트머스대 교수가 말한 리버스 이노베이션은 선진국 기업이 기술 격차를 전제로 신흥시장에서 제품과 서비스 혁신을 이룬 다음 이를 선진국으로 다시 가져간다는 전략이다. 그러나 기술 격차가 좁혀지면 선진국 기업이 아니라 신흥국 현지기업에 의한 리버스 이노베이션이 가능하다.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가 말한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도 현지기업에 의해 주도될 수 있다. 파괴적 혁신은 초기에 간단한 애플리케이션을 가지고 시장에 뿌리를 내려 끈질기게 시장을 잠식해 들어감으로써 결국에는 기존 경쟁자를 물리치는 과정이다. ‘존속적 혁신(sustaining innovation)’과 달리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거나 기존 시장을 재편한다는 의미다. 지난해 말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FT)는 알리바바, 샤오미 등 중국기업을 ‘파괴자(disrupter)’로 선정한 바 있다.

더구나 ‘혁신’은 기술 자체의 경쟁이 아니다. 그 기술을 누가 먼저 시장에서 꽃피우느냐의 게임이다. 진화경제학자 리처드 넬슨은 혁신이 일어나려면 ‘물리적 기술’과 ‘사회적 기술’이 맞아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리적 기술만큼이나 규제 등 사회적 변수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실제로 어느 쪽이 먼저 규제를 푸느냐에 따라 혁신의 성패가 갈리는 게 부지기수다. 기술적 인프라에 조금 앞섰다고 해도 혁신에서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인프라의 역설’이 현실화될 수도 있다.

한국시장의 중국 내수화 우려

우리가 경계해야 할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중국의 기술추격이 아니라 혁신의 역류 가능성이 우려되는 것이다. 이미 그런 조짐이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핀테크:더 이상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핀테크 기술 자체만 놓고 보면 중국이 한국보다 나을 게 하나도 없다. 그러나 중국은 우리보다 핀테크 혁신에서 앞섰다. 이제는 요우커(중국인 관광객)를 앞세워 한국시장까지 노린다. 중국발 리버스 이노베이션이 현실화하고 있는 것이다.

기술경쟁 아닌 혁신경쟁서 이겨야

◇원격의료:한국이 원격의료를 떠든 지 20년도 더 넘었다. 그러나 여전히 산간벽지에서 시범사업이나 벌이는 수준이다. 그마저도 정부와 의사협회가 티격태격하는 사이 중국 저장성 닝보시는 시 전체인구 760만명을 대상으로 원격진료를 하겠다며 ‘원격진료도시 계획’을 내놨다.

◇스마트 그리드:정작 전력 인프라가 좋다는 한국이 스마트 그리드에 우물쭈물하는 사이 중국은 스마트 그리드 국제표준을 선도하고 있다.

◇전기차:중국 토종 브랜드 창안자동차가 세계 전기차 시장에서 테슬라와 경쟁하겠다고 선언했다. 전기차 충전인프라도 독자표준을 만들어 국제표준으로 밀어붙인 중국이다.

◇스마트폰:중국시장에서 삼성전자를 제친 샤오미는 인도에 진출한 뒤 선진시장으로 향하려고 한다. 과거 선진국 기업들이 했던 전형적 리버스 이노베이션 코스를 따라가고 있다.

◇고속철:한국보다 늦게 시작한 중국 고속철은 해외로 뻗어나가는 중이다. 러시아, 인도, 미국 등 20~30개국과 고속철 건설을 협상 중이다.

◇줄기세포:한국이 규제 등으로 주춤하는 사이 중국은 줄기세포 시험장으로 변했다.

◇우주:중국이 한국을 멀찌감치 앞서 있다. 중국의 우주강국 급부상은 미국과 일본이 중국을 의식해 양국 간 새 방위협력지침에 우주협력을 담은 데서도 잘 나타난다.

◇스마트 팩토리:한국은 제조업 3.0으로 스마트 팩토리를 들고 나왔다. 하지만 중국도 2025년까지 제조업을 지능화한다는 계획이다. 독일 ‘인더스트리 4.0’과 ‘중국제조 2025’ 간 기술교류와 표준화 협력이 가시화되고 있다.

한국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금까지 한국은 중국시장의 내수화를 외쳐왔다. 그러나 이는 한국이 혁신에서 중국을 앞설 때나 가능하다. 만약 혁신이 중국에서 한국으로 역류하기 시작하면 이는 거꾸로 한국시장의 중국 내수화를 의미한다. 중국이 한국의 기술을 추격한다는 방어적·피해적 논리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정부도, 기업도 중국과의 기술경쟁이 아니라 혁신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전면적인 전략 변화가 필요하다.

안현실 논설·전문위원·경영과학 박사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