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어느 빵집 주인의 죽음
50대 중반인 동네 빵집 주인 박경선 씨가 죽었다는 소문은 골목길을 따라 빠르게 퍼져 나갔다. 하루에 세 시간만 자면서 악전고투하던 뒤끝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가 죽을 수도 있다고 걱정하던 중이었다. “저러다 죽지…!” 그는 결국 그렇게 죽고 말았다. 뇌종양이라고 했지만 동네 사람들은 너무 잠을 못 잔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빵집은 사흘을 쉬었다. 오페라 빵집이 생긴 이래 사흘을 쉰 것은 처음이었다. 아니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페라 빵집에 휴일 같은 것은 아예 없었다. 설 명절에도 오후엔 문을 열었다. 빵집 유리에는 ‘가족 사정으로 며칠을 쉬겠다’는 말이 쓰여 있었다. ‘상중(喪中)’이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 골목에 오페라 빵집이 들어온 지도 25년이 지났다. 조그만 빵집이었지만 빵맛은 파리바게뜨를 능가했다. 가짓수는 적었지만 주인의 수제 초콜릿 과자는 우아함을 자랑하고 있다. 매일 구워내는 밤빵은 또 얼마나 부드러운지. 주인 아주머니의 입담과 미소는 오페라의 ‘앙꼬’ 같은 것이었다. 수다스런 말 솜씨는 바로 옆 파리바게뜨의 제복 입은 종업원들이 결코 흉내낼 수 없었다. 말 없이 미소만 보여주던 바리톤 박경선과 노래를 부르는 듯했던 소프라노 아내의 하모니였다. 그렇게 살던 박경선이 덜컥 죽어 버린 것이다.

종업원들은 장사가 안돼 문을 닫은 빵집 지하 노래방을 개조한 직원 숙소에서 함께 살고 있다. 그의 빵집에는 항상 두세 명 정도의 수습 제빵사가 일을 배우고 있다. 박경선은 죽었지만 오페라는 죽지 않았다는 무언의 다짐을 지금 그들은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동네 주민들은 죽은 박경선의 빵맛이 유지되기를 기원하고 있다. 주민들은 아직은 변한 것이 없음을 발견하고 적이 안심하고 있다. 그의 빈소에는 많은 골목 빵집 주인들이 찾아와 명복을 빌었다.

오페라 빵집이 문을 열고 있는 골목 끝, 대로를 접하고 있는 둘둘 치킨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치킨집이다. 주민 수가 많은 옛 동네를 끼고 있는데다 큰길 건너편에는 대형 사무실 빌딩들도 밀집해 있다. 이 집 주인 아저씨도 동네 주민들의 걱정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다. 아침 9시가 되어서야 그는 의자를 몇 개 이어붙여 점심 전까지 두세 시간의 쪽잠을 잔다. 서울 강남 지역에서 밤일을 끝낸 사람들이 퇴근길에 ‘맥주 한잔!’ 한다는 식이어서 사람들이 출근하는 아침 7시대면 앉을 자리가 없다.

아침에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의 존재를 모른다면 아직은 서울의 밤을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 집 주인도 “저러다 죽지”라는 말을 애정 어린 핀잔으로 듣고 있다. 요즘은 다행으로 손님이 많이 줄었다. 덕분에 집에서 자는 날도 꽤 있다고 한다. 이 집 주인은 명동에서도 날렸다. 수백개 가맹점 중 전국 랭킹 1, 2위를 다투는 그런 가게의 주인들이라면 정말 피터지게 바쁠 수밖에 없다. 주인은 꽤 돈을 벌어 주위에 상가를 몇 개인가 매입했다고 한다. 물론 부동산 중개업소에서는 온갖 헛소문도 빠르게 퍼져 나간다. 돈을 꽤 벌었다는 소문은 오페라도 마찬가지였다.

자영업자들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골목 안쪽의 강자 GS25도 전국 가맹점 순위를 다툴 정도의 매상을 자랑한다. 바로 코앞의 한아름 슈퍼도 잘 버텨내고 있다. 가격은 한아름이 더 싸다. 한때는 정육도 같이 팔았지만 지금은 전통 잡화만 취급한다. 골목길에는 수백개 소형점포들이 버텨내고 있다. 죽는 가게만큼이나 새로 문을 여는 가게들도 많다. 요즘은 커피점들이 많이 생겨났다. 옷 가게와 치킨 집은 특히 주인이 자주 바뀌고 있다.

빵집 주인이 죽은 그날 아침에도 종업원들은 가게 문을 열었다. 두 딸과 막내 아들은 빈소에서 손님을 조용히 맞았다. 어찌 아버지의 죽음이 슬프지 않아서이겠는가. 그리고 며칠 뒤…. “빵집 문 열었다!” 하는 조그만 감탄사들이 부고만큼이나 빨리 골목을 번져 나갔다. 어느 정치권 마당발의 자살로 온통 소란인 와중에 동네 빵집 박경선이 죽었다. 그러나 오페라는 아직 죽지 않았다.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