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열 총재의 '10년 같았던 1년'] 경기부양 총대 멘 드라기·구로다 vs '경기-구조개혁' 고뇌한 이주열
“100년 뒤 지금을 돌아본다면 ‘중앙은행의 시대(전성기)’라고 할 것이다. 각국 장관이 누군지는 몰라도 옐런, 구로다, 드라기 이름은 다 안다. 그런데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역사책에 이름은 나올까.”

올초 한 이코노미스트가 ‘오프 더 레코드(비보도)’를 전제로 던진 쓴소리였다. 미 중앙은행(Fed)의 대규모 양적 완화가 죽어가던 미국 경제의 숨결을 되찾아온 듯하고, 유럽중앙은행(ECB)과 일본은행 역시 돈풀기에 여념이 없다. 작년 말부터는 스웨덴 중국 호주 터키 등 20여개국 중앙은행까지 완화 행진에 가세했다.

자국 경기부터 살리고 보자는 ‘디플레 파이터’들의 대활약 속에 이 총재는 상대적으로 조용해 보였다. 빗발치는 총성 한가운데서도 그는 “통화전쟁이 아니다”고 했다. 그러던 그가 지난 12일 기준금리를 연 1.75%로 인하했다. 올 들어 세계에서 24번째 금리 인하였다. 23번의 망설임과 한 번의 결단. 급박하게 돌아가는 세계 중앙은행 질서에서 이 총재가 처한 현주소다.

◆디플레 파이터 구로다와 드라기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는 중앙은행의 힘 없이는 일어서기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디플레 파이터의 선봉엔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가 있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부의 경기부양책(아베노믹스)과 함께 대규모 양적 완화를 지속했다. 엔화가치는 빠르게 떨어졌고 기업 실적은 나아졌다. 시중에 풀린 막대한 유동성은 일본 증시를 끌어올렸다.

최근 글로벌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또 한 명은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다. 오석태 소시에테제네랄증권 이코노미스트는 그에 대해 “앨런 그린스펀 전임 Fed 의장의 위상을 가져갔다”며 “제각각인 유로존 국가들의 목소리를 통합하면서 영웅으로 떠올랐다”고 평가했다.

재닛 옐런 미 Fed 의장은 상황이 좀 다르다. 금융위기 이후 대규모 양적 완화에 힘입어 고용시장에 훈풍이 불어오자 그는 양적 완화 축소(테이퍼링)를 추진했다. 경기 부양을 지나 금리 정상화에 나서야 하는 상황이지만 그는 그 속도를 점진적으로 조절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세계 금융질서를 주도하는 이들 셋의 완화적 태도는 다른 중앙은행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문홍철 동부증권 연구위원은 “호주 말레이시아 덴마크 등은 자국 통화가치를 내리기 위해 추가 완화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구조개혁론으로 방어한 이주열

이 총재는 최근까지도 ‘통화전쟁으로 볼 수 없다’며 선을 그었다. 한은의 고위 관계자는 “통화전쟁을 선언하는 순간 다른 중앙은행에 대한 선전포고가 된다”며 “이 같은 불문율 탓인지 한은은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것처럼 보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총재는 완화 일색의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까지 보였다. 한은은 지난해 도쿄사무소 조사를 토대로 “아베노믹스와 구로다 총재의 완화 정책이 성공하려면 구조 개혁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돈 풀기만으로는 경제를 살리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게 그의 인식이었다. 저출산과 고용시장의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금리를 낮춰도 그 효과가 반감된다는 분석이었다. ‘금리 인하 압박을 피하려는 방어 논리 아니냐’는 의심도 있었지만, 그의 구조개혁론에 공감을 표시하는 측도 적지 않았다.

그랬던 이 총재가 이달 기준금리를 다시 낮췄다. 각국 통화가치가 크게 내리면서 가만히 있던 원화에 대해 강세 압박이 커졌다. 시장과 정부는 뒤늦게라도 디플레와 싸우는 한은이 되길 기대했다. 미국의 금리 인상 시점이 예상보다 늦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완화 정책에 무게를 실었다.

이 총재의 고민은 디플레 파이터에 그칠 수 없다는 데 있다. 구로다 총재는 아베 총리라는 막강한 지원자가 있고 드라기는 개별 국가를 넘어서는 통합된 리더십을 바탕으로 한다. 옐런 의장은 누가 뭐래도 기축통화국의 총재다.

한은 관계자는 “구조개혁의 세부적인 내용을 채우자는 게 이 총재의 고민”이라며 “필요하면 고용시장의 이중구조 등 정책 제언까지 하겠다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김유미/김은정 기자 warmfron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