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꿈꾸던 할리우드 키드
우연히 본 연극에 마음 빼앗겨"
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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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눈이 좀 부었죠?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요즘은 술을 조금만 마셔도 다음날 이렇다니까. 허허.”

‘한국 뮤지컬계 대부’로 불리는 윤호진 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장(67)은 약속 장소인 서울 대학로의 ‘광나루 부대찌개’에 옅은 색 선글라스를 끼고 나타났다. 전날 음주한 흔적을 감추고 싶었던 모양이다.

“(눈 주위를 어루만지며) 표나지 않게 잘 좀 찍어줘요. 어제저녁 박동우 무대디자이너 등 중국 하얼빈에서 공연했던 ‘영웅’의 무대기술팀 10여명과 회식을 했어요. 하얼빈에서 고생한 얘기를 하다 보니 아무래도 많이 먹게 되더라고요.”

지난 2월7~8일 하얼빈에서 열린 뮤지컬 ‘영웅’ 공연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했다. 윤 원장은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를 다룬 ‘영웅’을 2009년 처음 무대에 올릴 때부터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역사적 현장인 하얼빈에서 공연하고 싶었다. 중국 당국의 허가 지연, 열악한 현지 환경, 공연비 부족 등 숱한 난관을 뚫고 5년여 만에 꿈을 이뤘다.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3회 열린 공연 모두 1600석의 극장이 가득 찼다. 박진감 넘치는 군무와 현란한 무대 전환, 영상, 배우들의 열연에 중국 관객들은 아낌없는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이번 공연을 통해 한국 뮤지컬의 수준과 위상이 중국에 알려지기 시작했어요. 베이징 난징 선양 등 여러 도시에서 자료 요청이 왔어요. 중국이란 거대한 시장을 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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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을 취재했던 기자와 하얼빈의 감동을 나누는 사이에 상이 차려졌다. 영양부추무침 두부구이 시래기나물 달걀찜 등 밑반찬이 깔리고 햄과 소시지 콩나물 등이 가득 담긴 부대찌개 냄비가 올라왔다. 윤 원장은 2012년 홍익대 대학로캠퍼스에 신설된 공연예술대학원의 초대 원장을 맡으면서 이 식당 단골이 됐다.

“좋은 재료를 쓰고 주인아주머니 음식 솜씨도 좋아요. 아주머니가 직접 만드는 밑반찬도 맛있어서 ‘집밥’ 먹는 느낌이랄까. 음식값도 싸고요. 방송통신대 학생들이 자주 오는데 주인아주머니가 다른 손님들에게도 학생 대하듯 푸근하게 대해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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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이야기가 이어졌다. ‘영웅’은 올해 한·일 수교 50주년과 광복 70주년을 기념해 내달 14일부터 5월31일까지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 무대에 오른다. 하얼빈 출연진과 제작진이 그대로 참여한다. 이번 공연의 특징은 ‘영웅’ 사상 처음으로 녹음 반주(MR)가 아니라 오케스트라 라이브 연주를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오케스트라를 쓰면 작품의 격이 달라져요. 그동안 제작비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이번엔 한번 해보자고 했죠. 음악의 생동감이 훨씬 살아날 거예요. 또 배우들이 하얼빈에서 안 의사의 체취를 직접 맡고 왔으니 뭔가 기운과 각오가 다를 거라 생각합니다.”

찌개가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윤 원장은 “부대찌개에 들어가는 콩을 좋아하는데 여긴 콩을 많이 넣어 준다”며 개인 접시에 한 국자씩 직접 떠서 나눠 줬다. 콩나물이 많이 들어가서 그런지 국물 맛이 진하다기보다는 개운하다. “속 푸는 데 좋을 것 같다”고 하자 “음, 그렇지” 하며 빙그레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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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그의 꿈은 영화감독이었다. 중·고교 시절 서울 주요 극장을 돌며 영화를 1주일에 네 편씩 보는 ‘할리우드 키드’였다. 고교 2학년 때 누나가 건네준 연극표가 연극에 눈을 뜨게 했다. 연극영화과에 진학하고 싶었으나 집안의 반대로 홍익대 공대 정밀기계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무대를 향한 꿈은 버리지 않았다. 대학 3학년이던 1970년 극단 실험극장에 연구생으로 입단했다. 배우로 몇 번 무대에 서기도 했으나 그가 하고 싶은 일은 ‘만드는 것’이었다.

그가 1977년 연출한 연극 ‘아일랜드’가 공전의 히트를 쳤다. 29세였던 그해 윤 원장은 이 작품으로 최연소 동아연극상 연출상 수상자가 됐다.

1982년 1월 초 문화예술진흥원의 연극연출가 해외연수 대상자로 뽑혀 영국 런던에 갔다. 도착 첫날 별생각 없이 뉴런던시어터에서 갓 막이 오른 뮤지컬 ‘캣츠’ 초연을 봤다. 그의 무대 인생이 바뀌는 운명적인 순간이었다.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무대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나 싶더라고요. 저런 멋있는 장면에 귀에 착착 감기는 노래라니, 판타지가 보였습니다. 뮤지컬을 하지 않으면, 뮤지컬을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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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돌아와 1983년 윤석화를 스타로 만든 연극 ‘신의 아그네스’를 연출한 후 1984년 뉴욕 유학길에 올랐다. 뉴욕대 공연예술대학원에서 4년간 체계적으로 뮤지컬을 배웠다. 1991년 공연제작사 에이콤인터내셔날을 설립하면서 뮤지컬 인생이 시작됐다. 처음부터 꿈을 크게 가졌다. 해외에 진출해 세계 무대에서 통할 작품을 만들고자 했다. 1995년 한국 뮤지컬 역사에 새 장을 연 뮤지컬 ‘명성황후’를 황후 서거 100주기를 맞아 무대에 올렸다.

“‘명성황후’로 하고 싶은 건 다 해봤어요. 뉴욕에서 돌아온 지 10년 만(1997년)에, 런던 연수를 간 지 20년 만(2002년)에 뮤지컬 양대산맥인 두 곳에서 내가 만든 작품을 공연했습니다. 현지 반응도 뜨거웠고, 외국에서 ‘명성황후’를 주제로 쓴 논문도 여러 편 돼요. 세계에 한국 뮤지컬을 알렸다고 할까요. ”

‘명성황후’는 초연 20주년을 기념해 오는 7월25일부터 9월12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된다. “10년을 내다본 새로운 버전의 ‘명성황후’를 준비하고 있어요. 좀 더 현대적이면서 긴장감 넘치고 화려하고 입체적인 작품으로 싹 바뀔 겁니다.”

‘명성황후’ 이후 한국 뮤지컬은 눈부시게 성장하고 발전했다. 연간 시장 규모가 3000억원대로 커졌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창작 뮤지컬(연간 110~120편)을 제작한다. 윤 원장은 “지금까지 고생해서 쌓은 노하우를 이제 아시아 시장에서 활용할 때”라고 말했다.

“한국 뮤지컬의 수준은 뮤지컬을 앞서 들여온 일본보다 10년 이상 앞서 있어요. 중국 등 다른 나라와는 비교도 안 되죠. 뮤지컬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거대한 중국 시장부터 나아가야죠.”

그는 오는 9월부터 중국 ‘영웅’ 투어 공연을 본격 추진할 계획이다. 난징과 선양, 하얼빈을 투어 도시로 꼽고 있다. 전날 무대기술팀과의 회식에서도 투어용 무대세트를 효율적으로 만들어 5일가량 걸리는 무대 설치 작업을 3일 이내에 끝내는 방안을 집중 논의했다고 했다. 투어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서다.

윤 원장은 “지난 하얼빈 공연은 정부 지원금을 받았는데 앞으로는 지원 없이 공연 자체만으로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가려고 한다”며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중국 시장에 맞는 작품도 개발 중이다. 중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인민해방가’와 ‘연안송’ 등을 작곡한 중국동포 음악가 정율성(1918~1976)의 극적인 생애와 중국 대장정을 엮은 작품을 구상하고 있다.

윤 원장의 머릿속에는 앞으로 만들어야 할 작품이 가득하다. ‘명성황후’와 ‘영웅’에 이어 한·일 관계를 다룬 새로운 시대극도 그중 하나다. “위안부 할머니를 다룬 이야기를 세 번째 작품으로 하려고 해요. 가슴이 아프겠지만 할머니들이 꽃다운 청춘이었을 때 가졌던 꿈을 아름답게 표현해 보고 싶어요. 글 쓰는 재주가 탁월한 재일동포 극작·연출가 정의신 씨에게 대본 작업을 부탁해 놨습니다.”

윤 원장은 공연계에서 ‘뚝심의 사나이’로도 불린다. 하고 싶은 일을 이뤄내는 추진력이 대단하다는 의미다. 단국대 공연영화학부 교수 시절부터 20년간 예술가 지망생을 가르치고 있는 그가 학생들에게 자주 하는 얘기는 ‘꿈을 꾸고 그 꿈을 이야기하라’는 것이다.

“꿈만 꾸고 있으면 망상입니다. 꿈을 현실로 만들려면 많이 말해야 해요. 이야기를 하면서 스스로 의지를 다지고 꿈을 다듬어 나가기도 하는 것이죠. 꿈을 이루는 데 가장 앞선 것은 신념이라고 생각해요. ‘명성황후’가 뉴욕에 가고 ‘영웅’이 하얼빈에 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신념이었습니다. 반드시 해내야겠다는 신념만 있으면 어떤 어려운 환경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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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호진 원장의 단골집 광나루 부대찌개
콩나물 듬뿍 넣은 부대찌개…보들보들 달걀찜도 일품


[한경과 맛있는 만남] 윤호진 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장 "명성황후로 세계무대서 '名聲'…뮤지컬 '영웅' 中 대륙 울릴 것"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대학로 쪽 입구에서 이화사거리 방향으로 조금 가다가 ‘대학로 빽다방’ 옆 골목으로 들어가면 빨간색 외관의 ‘광나루 부대찌개’가 눈에 띈다. 찌개를 전문으로 하는 작은 식당이다. 메뉴는 부대찌개 김치찌개 된장찌개 순두부찌개 등 찌개류뿐이다. 가격은 모두 6000원. 주메뉴인 부대찌개는 햄 소시지 통조림콩 등 건더기가 많은 편이다. 콩나물이 많이 들어가고 사골 육수를 쓰지 않아 국물 맛이 개운하다. 반찬은 5~6가지가 놓인다. 김치 빼고는 날마다 종류가 달라진다. 주인아주머니가 모든 반찬을 직접 만든다. ‘집밥’을 먹는 것 같은 손맛이 느껴진다. 보들보들한 맛이 일품인 달걀찜(4000원)은 별도로 시켜야 한다. 제육볶음(1만3000원) 모둠철판(3만~4만원) 낙지철판(3만~4만원) 등은 술을 곁들인 저녁 식사 때 인기 메뉴다. (02)744-9260

亞 첫 브로드웨이 공연…명성황후 신드롬 불러

뮤지컬 ‘명성황후’는 2007년 3월 100만 관객을 넘어섰다. 1995년 첫선을 보인 지 12년 만이다. 대형 창작뮤지컬 중 관객 100만명을 돌파한 작품은 ‘명성황후’가 유일하다. 아시아 작품으로는 처음으로 1997년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랐다. 2002년에는 영어 버전으로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 2004년엔 캐나다 토론토에서 공연했다.

송태형/김인선 기자 toughlb@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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