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한은, 디플레 파이터가 되라
한 일본 회사 노조의 투쟁 구호가 ‘임금 동결’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노조가 임금 동결을 주장하다니’ 할지 모르지만, 모든 것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임금만은 떨어뜨리지 말아 달라는 요구다. 디플레이션의 위력을 느끼게 되는 대목이다.

디플레이션은 물가가 전반적으로 하락하는 현상이다. 일각에서는 ‘물가가 떨어지면 좋은 것 아니냐’고 지적한다. 물론 자기 월급 올라가는데 물가만 떨어지면 금상첨화다. 그러나 물건값이 떨어지면 기업 매출이 줄고 결국 월급도 깎인다. 경제주체들은 명목금액에 매우 민감하다. 들어오는 급여의 액수가 동결되거나 줄어들면 위기감이 생긴다. 돈을 쓰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고 지갑은 굳게 닫힌다. 액수가 줄면 월급이 줄어드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소비가 줄어든다. 경제주체들이 실질 가치만이 아니라 명목 숫자에 상당한 영향을 받는 현상을 ‘화폐환상’이라고 한다. 디플레는 바로 이 화폐환상과 결합되면서 경제주체들의 심리를 얼어붙게 만든다.

만일 경제 내에 물건값이 계속 떨어질 것이라는 디플레 심리가 정착되면 이는 재앙이다. 예를 들어 부동산은 사면 무조건 손해다. 거래는 얼어붙는다. 부동산만이 아니다. 모든 소비가 이렇게 된다. 물건 판매는 줄고 소비가 하락하고 소득이 감소하면서 가격이 더 떨어진다. 악순환 고리가 고착되면서 돈이 돌지 않고 경제에 빙하기가 도래하는 것이다.

이러니 전 세계 중앙은행이 물가상승률 목표치를 플러스 숫자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 이해가 간다. 마이너스 물가상승률을 목표로 할 만도 하지만 디플레가 그야말로 ‘쥐약’이다 보니 목표치는 항상 플러스다. 물가가 약간씩 상승해줘야 ‘오르기 전에 사자’ 하면서 집도 보러 다닌다. 인플레율이 연 2~3% 정도인데 집값 상승률이 그 정도라면 부동산 투기가 절대 아니다. 경제가 부드럽게 움직이면서 돈이 잘 돌도록 하기 위한 윤활유 수준이다. 부동산 거래가 일어나야 빚 많은 사람이 집을 팔고 빚을 갚을 수 있으니 가계부채 해결에도 도움이 된다.

그동안 한국은행은 전통적으로 ‘인플레 파이터’ 역할을 해왔다. 인플레와의 싸움은 고독하지만 멋진 싸움이었다. 경기부양을 원하는 정부가 인플레를 용인하려 할 때 이에 맞서 돈줄을 죄고 금리를 올리는 것은 외롭지만 보람 있는 투쟁이었다. 그런데 싸움의 대상이 디플레로 바뀌면 투쟁 양상은 확 바뀐다. 무엇보다 디플레와의 투쟁은 정부가 원하는 방향과 일치한다는 것이 문제다. 모양새가 영 아니다. 금리를 내리고 돈을 풀다 보면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훼손되는 듯 보이면서 시류에 영합하는 기회주의자의 모습까지 겹쳐진다. 디플레와의 싸움이 별로 내키지 않는 이유다. 더구나 한은은 한때 ‘재무부 남대문 출장소’라는 조롱까지 참아야 했던 트라우마가 있다. 이러니 ‘디플레 파이터’가 되기를 주저할 만도 하다.

이번에는 다르다. 글로벌 위기 이후 미국을 제외한 전 세계적 상황이 너무 나빠지고 우리 경제 상황도 덩달아 심각해지고 있다. ‘한국은행만으로’ 해결이 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한국은행 없이는’ 절대 해결이 안 된다. 대부분 국가에서 중앙은행은 디플레 파이터가 되고 있고 선진국 은행들은 아예 확실하게 양적 완화까지 시행하고 있다.

더위와 싸울 때는 선풍기와 에어컨이 필요하고 다른 사람들과는 거리를 둬야 덜 덥다. 추위와 싸울 때는 온풍기와 전기장판이 필요하고 다른 사람들과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체온을 나누는 것이 유리하다. 인플레가 더위라면 디플레는 추위다. 물가상승률이 한은의 물가목표치 하한선을 밑돈 지 오래고 우리 경제는 디플레 초입에 들어서고 있는 조짐이 보인다. 한은이 디플레 파이터로 변신하면서 적절한 전략을 짜고 전투에 대비하는 것이 절실한 상황이다. 나아가 한은과 정부, 그리고 지역구민의 어려움을 감안해 돈이 돌도록 하는 데 앞장서야 할 정치권까지, 이제라도 어깨동무를 하고 힘을 합쳐 디플레와의 전쟁에 확실하게 대비하기를 기대해본다.

윤창현 < 한국금융연구원장 chyun3344@daum.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