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완 국제부장 psw@hankyung.com
[박성완의 데스크 시각] 치프라스는 공약을 믿었을까

그리스는 지난주 유로존 재무장관들과의 협상을 통해 구제금융을 오는 6월 말까지 4개월 연장 받았다. 그리스는 새 경제개혁안을 채권단에 제출했고, 개혁안이 잘 이행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으면 4월 말 나머지 72억유로의 분할지원금을 받게 된다. 그리스 정부가 스스로 작성한 개혁안을 제출한 모양새라 체면치레는 했지만 어쨌거나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는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에서 ‘생각보다 덜 위험한 남자’가 됐다.

그리스가 제출한 개혁안에는 탈세 방지를 통한 재정 확충과 정부조직 축소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최저임금 인상엔 신중하고, 진행 중이거나 완료된 공기업 민영화는 되돌리지 않기로 했다. 탈세 방지를 강조한 것 등은 선거 때 치프라스가 이끄는 시리자(급진좌파연합)가 특권 부유층을 부패의 온상으로 지목하며 손보겠다고 했던 공약과 맥을 같이한다. 약속했던 빈곤층 지원 내용도 들어 있다. 그렇긴 해도 구제금융 중단과 긴축정책 철폐, 재협상을 통한 채무탕감 등을 호기롭게 주장했던 치프라스로선 ‘백기’를 든 것과 다름없다는 평가다.

空約된 긴축철폐·부채탕감 公約

‘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이탈)’ 우려까지 낳았던 시리자의 공약과 현실적으로 타협한 개혁안을 보면서 궁금해졌다. 치프라스는 빚을 깎아 달라고 채권단을 설득하는 게 진짜 가능하다고 생각했을까. 돈을 빌려줄 때부터 그리스의 ‘도덕적 해이’를 염려했던 독일과, 똑같이 구제금융을 받고서도 허리띠를 졸라매 돈을 갚은 아일랜드 같은 나라가 있는데 말이다. 또 이제 공약을 믿고 찍어 준 국민들을 어떻게 설득하면서 개혁을 추진해 나갈까. 아직은 지지율이 높다지만 국민들이 이전 정권과 별반 다를 게 없다고 느끼기 시작하면?

그리스가 2010년과 2012년 국가파산 위기에 몰려 구제금융을 받을 때 1990년대 후반 한국의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당시와 비교하는 글들이 외신에 등장했었다. 한국인들은 ‘금 모으기’를 하며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했는데 그리스인들은 오히려 ‘금 사재기’를 하고 긴축 반대 시위를 하고 있으니, 그리스가 한국을 배워야 한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정치 프레임에 꼬이는 경제 스텝

그런데 요즘 한국에선 우리도 이대로 가다간 그리스처럼 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들린다. ‘증세 없는 복지’라는 공약의 덫에 걸려 스텝이 꼬이는 현 정부의 정책들을 두고서 나오는 얘기들이다.

선거 전략으로만 본다면 ‘증세 없는 복지’는 성공했다. 자기 주머니에서 돈이 나가는 것은 싫고, 뭔가를 공짜로 받는 것 같으면(실제는 공짜가 아니지만) 혹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간파해 표를 얻었으니. 그리스 국민들도 긴축엔 반대하지만 긴축을 요구하는 유로존에 남는 것은 80%가 찬성한다.

한 전직 대통령이 재임 때 측근에게 “정치가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어봤다고 한다. 머뭇거리는 측근에게 그는 “정치는 선거”라고 잘라 답했다. “국민을 잘살게 하는 것”과 같은 성군(聖君)의 대답을 기대했다면 실망이겠지만 냉정히 생각해 보면 현실을 가장 정확히 꿰뚫어 본 말이다. 그런데 그 현실이 막다른 길의 출발점이 되고 있는 게 문제다. 그리스로 다시 시선을 돌려본다. 치프라스 총리는 자신의 공약을 믿었을까. 아니면 그도 정치는 그냥 선거라고 생각했을까.

박성완 국제부장 ps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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