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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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51)의 ‘보물 1호’는 선친인 고(故) 서성환 태평양 창업회장의 여권이다. 이 여권에는 서 창업회장이 1960년 7월 화장품 종주국 프랑스에 출장갔을 때 직항 노선이 없어 6개국이나 경유해 겨우 도착했던 기록을 비롯해 한국 화장품 업계 대부로서의 사업 여정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아시안 뷰티 크리에이터(동양적 미의 창조자)’를 경영 목표로 삼고 있는 서경배 회장은 한 해 3분의 2 이상을 국내외 출장으로 보낸다. 그는 사업구상에 어려움을 느낄 때마다 아버지의 여권을 꺼내보며 “선대 회장께선 지금보다 훨씬 힘든 조건에서도 이겨내셨는데…”라며 마음을 다잡는다고 한다.

부자가 대를 이어 다져 온 ‘글로벌 화장품 기업’의 꿈은 요즘 결실을 맺고 있다. 아모레퍼시픽이 가장 주력하고 있는 해외 시장인 중국 매출은 2011년 1909억원에서 2014년 4500억원으로 급증했다. 이 회사는 연평균 40%의 고성장을 이어가 2020년 중국에서만 3조원대 매출을 올리고, 해외 매출 비중이 51%를 넘는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겠다는 비전을 갖고 있다.

프랑스에서의 굴욕

“가져가세요. 몇 달 동안 한 개도 안 팔렸어요. 보세요, 먼지 쌓인 거.”

1994년 프랑스 파리의 한 화장품 매장. 점주가 진열대를 가리키며 심드렁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당시 태평양 기획조정실 사장이었던 서 회장에게는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태평양이 1991년 프랑스에서 출시했던 ‘순정’이라는 브랜드를 철수하기로 결정하고 직접 제품을 거둬들이러 간 것이었다. 현지 공장까지 매입해 야심차게 출시했던 제품이었지만, 시장조사가 어설프게 이뤄졌던 탓에 참패하고 말았다. 서 회장은 수거한 제품을 불태우면서 ‘철저한 준비가 없으면 시장의 반응은 이토록 냉담하구나’라는 것을 절감했다고 한다. 순정의 실패로 태평양은 50억원을 손해봤다. 하지만 그 50억원은 10년 후 이 회사가 중국에서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는 밑거름이 됐다.

화장품도 R&D가 살길

아모레퍼시픽이 중국 선양에 지사를 설립한 건 한·중 수교가 이뤄진 1992년이다. 서 회장은 프랑스에서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중국에서는 연구개발(R&D)과 시장조사에 전력을 기울였다. 국제화장품박람회에 참석해 업체 사람들을 직접 상대하고, 주요 화장품 매장을 구석구석 돌았다.

아모레퍼시픽은 지금까지 중국 여성 5200여명의 피부를 연구했다. 상하이, 선양, 베이징, 무한, 청두, 광저우 등 6대 도시의 피부과 병원과 함께 지역별 여성들의 피부 특성과 필요한 화장품의 기능 등을 분석했다. 중국약과대, 상하이중의약대, 베이징공상대 등과는 천연물과 약재를 공동 연구하고 있다.

그 결과 중국 여성의 피부에 맞춘 다양한 제품이 개발됐다. 중국 사업의 간판 브랜드인 마몽드의 경우 현지에서 판매하는 123종 중 중국 전용 제품이 53%나 된다. 라네즈의 ‘워터 슬리핑 팩’은 편의성을 중시하는 중국 여성들을 겨냥해 씻어낼 필요 없이 자는 동안 바르고 있도록 한 것이 큰 히트를 쳤다. 치밀한 현지화가 적중해 라네즈와 마몽드의 중국 매출 비중은 최근 50~60%대까지 상승, 국내 매출을 뛰어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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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레퍼시픽이 중국에서 첫 흑자를 낸 건 진출 15년 만인 2007년이다. 서 회장은 지금까지 중국에 120번 넘게 출장을 다녀오며 현지 연구소와 사업장을 챙기고 있다. 서 회장이 중국 사업과 관련해 직원들에게 늘 강조하는 말이 있다. “선양에 이어 2002년 상하이 공장을 세우고 라네즈를 처음 출시했을 때도 우리는 무명기업이었고 10년 동안 인지도를 올리는 데 가장 큰 힘을 쏟았습니다. 우리가 중국을 잘 아는 것 같아도 실제론 모르는 것 투성이고 아직도 모르는 게 너무 많습니다.”

이젠 랑콤·디올이 베낀다

아모레퍼시픽의 성공은 외국 화장품을 모방하지 않고 독자 개발한 제품을 통해 이뤘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이젠 오히려 서구권 화장품 업체들이 베껴가는 상황이 됐다. 2008년 내놓은 쿠션 화장품이 대표적인 예다. 쿠션은 선크림, 메이크업 베이스, 파운데이션 등 기초 메이크업 제품을 특수 스펀지 재질에 흡수시켜 팩트형 용기에 담은 것으로 ‘주차도장’ 찍듯 피부에 툭툭 찍어 바르면 화장이 끝난다. 아모레퍼시픽 쿠션이 해외 유명 패션 잡지에도 소개될 정도로 인기를 끌자 랑콤, 크리스찬디올 등이 유사 상품을 개발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사업이 탄력을 받기 시작한 2010년대 들어 새로 진출한 브랜드들은 ‘K스타일’을 전면에 내세웠다. 한방 화장품 설화수(2011년), 제주산 천연 재료를 활용한 이니스프리(2012년), 한류 붐을 활용한 에뛰드(2013년) 등이 속속 중국에 상륙해 매장을 늘리고 있다. ‘우리만이 만들 수 있는 것’으로 ‘서양의 화장품 기업과는 다른 길’을 가겠다는 게 서 회장의 지론이다.

서 회장은 눈 화장에 쓰는 마스카라 정도만 빼고, 아모레퍼시픽에서 나오는 모든 신제품을 직접 써 본다. 그는 중국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화장품 강국인 미주와 프랑스에서도 보폭을 넓혀 이들 세 지역을 3대 사업축으로 삼겠다는 구상이다. “화장품은 그 나라의 국격과 국가 이미지를 나타내주는 제품이기도 합니다. 아모레퍼시픽을 세계 1위인 로레알과 경쟁하는 기업으로 키워 한국의 국격이 프랑스에 버금갈 수 있도록 하는데 보탬이 되겠습니다.”

■ 아모레퍼시픽은
주가 222만원 ‘황제株’…16년새 100배 올라

신제품 내놓는 R&D 역량 최대 강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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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레퍼시픽은 1945년 설립돼 올해로 70돌을 맞는다. 설화수, 헤라, 아이오페, 라네즈, 에뛰드 등 고가부터 중저가를 아우르는 30개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다.

화장품 업계에서는 화장품 한 분야에 ‘선택과 집중’을 한 서경배 회장의 전략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이 회사의 모태는 서 회장의 할머니인 고(故) 윤독정 여사가 1930년 개성남문 앞에서 머릿기름을 팔기 시작한 창성상점이다. 서 회장의 선친인 고(故) 서성환 회장이 태평양이라는 이름으로 사업체를 세웠다. 태평양그룹은 1990년대 초반 화장품 외에 건설, 증권, 패션, 야구단, 농구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업을 벌였다. 1994년 경영 전면에 나선 서 회장은 다른 사업은 과감히 정리하고 화장품에 집중하는 구조조정을 주도했다.

아모레퍼시픽은 경쟁업체에 없는 새로운 유형의 화장품을 다양하게 개발하는 연구개발(R&D) 능력이 가장 큰 장점으로 꼽힌다. 아이오페 ‘에어쿠션’을 비롯한 쿠션 화장품, 제주도 유채꽃과 녹차 등을 원료로 활용한 이니스프리, 기초화장의 마지막 단계에 사용하는 신종 화장품인 설화수 ‘미안피니셔’ 등이 대표 사례다.

1998년 외환위기 때 2만원 아래까지 떨어졌던 주가는 지난 30일 222만원에 마감, 16년 만에 100배 이상 오르며 국내 증시의 ‘황제주’가 됐다. 서 회장의 지분평가액은 6조원대로 삼성 이건희 회장과 이재용 부회장에 이어 ‘주식부자’ 3위에 올랐다. 중국 사업 확대를 위해 지난해 10월에는 상하이에 기존 공장의 면적과 생산능력을 10배로 늘린 새 공장(사진)을 준공했다.

■ 서경배 회장은

△1963년 서울 출생 △1985년 연세대 경영학과 졸업 △1987년 미국 코넬대 경영대학원 졸업 △1987년 태평양 입사 △1997년 태평양 대표이사 사장 △2003년~ 대한화장품협회 회장 △2013년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 △2014년~ 서울상공회의소 부회장

임현우 기자 tard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