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덕에 더 강해질까…'臥薪 삼성' 조용한 혁신
이건희 삼성 회장이 지난 5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지면서 삼성그룹은 큰 혼란에 빠졌다. 그룹 기함 역할을 하는 삼성전자의 수익성은 정점을 지나 곤두박질쳤다. 샤오미 등 중국 스마트폰 업체들이 맹추격해오는 상황에서 뚜렷한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했다. 무선사업부의 비대해진 조직은 이제는 골칫거리가 됐다.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등 조직 내부의 불안감이 급속히 확산됐다. 이 회장의 장기 부재로 위기감은 더 컸다.

하지만 차세대 리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조용하지만 분명한 변화를 꾀했다. 내부 반발을 무릅쓰며 스마트폰 모델을 확 줄이기로 결정했다. 중소기업들의 불만에도 제품 수준을 높이기 위해 부품 자체 생산 비중도 과감히 늘렸다. 임직원의 동요가 없지 않았지만 조직 군살도 어느 정도 정리했다. 백혈병 피해를 보상하기 위한 협상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위기감을 조성하기 위해 내년 임원 연봉은 동결하기로 했다. 1993년 이건희 회장이 “처자식 빼고 다 바꾸자”고 주창했던 개혁 DNA가 ‘이재용 스타일’로 구현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과감한 구조조정 단행

삼성전자는 위기 때마다 체질 변화를 모색해 재도약했다. 1997년 외환위기 때도 대규모 구조조정을 선제적으로 단행해 ‘승자의 조건’을 갖춰갔다. 회사의 골프 회원권을 모두 처분할 정도로 강도가 거셌다. 2008년 미국발(發) 금융위기가 터지기 전에도 과감하게 부실을 털어내면서 스마트폰 사업에 역량을 집중했다.

올해도 이 같은 위기 대응 역량은 어김없이 발휘됐다. 비대해진 조직을 별다른 잡음 없이 줄였다. 축적된 구조조정 노하우를 활용해 조직 개편의 당위성을 임직원들에게 설득한 뒤 전환 배치 등을 활용해 무선사업부 인력을 크게 줄였다. 이달 초 인사에서 실적이 부진한 IM(IT·모바일) 사업부문의 신종균 사장을 유임시켜 조직을 안정시키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부문 내 사장급 7명 중 4명을 내보낸 것이 대표적 사례다.

최근 조직개편에서 소프트웨어를 담당하는 미디어솔루션센터와 전사 기업 간 거래(B2B) 업무를 책임지던 글로벌B2B센터를 해체하고 관련 기능을 현장 업무와 직결된 각 사업부에 넘긴 것도 조직에 긴장감을 불어넣기 위한 조치였다.

앞으로 문제 소지가 될 만한 사회적 갈등도 해결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반도체 라인 근무자의 백혈병 발병과 관련, 그간 삼성을 계속 공격해온 백도명 서울대 환경보건학과 교수를 조정위원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적극적이다.

‘이재용 시대’ 기틀 마련

사업 측면에서도 변화가 적지 않다. 스마트폰 모델 수를 대폭 줄인 것이 대표적 사례다. 그간 국가별로 따로 출시하던 특화모델을 대부분 없애고, 가격대별 대표모델 몇 개만 남기기로 한 것이다. 삼성 관계자는 “모델 수가 많은 것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고, 각각의 모델을 담당하는 이해관계자도 적지 않아 숫자를 줄이는 것이 쉬운 게 아니다”며 “이 부회장의 강력한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제조 부문에서는 부품 등을 자체 생산하는 내재화율을 크게 높인 것이 눈에 띄는 변화다. 생산 효율을 높이고 최고 수준의 부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외부에 의탁하는 것보다 자체 생산하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다. 그간 부품을 공급해온 중소 협력업체들의 불만이 적지 않았지만 ‘방침이 서면 밀어붙이는 뚝심’을 다시 한번 발휘했다.

이 밖에 신성장동력을 찾기 위해 사물인터넷(IoT) 업체 스마트싱스를 2억달러에 인수하는 등 굵직한 글로벌 기업들을 잇따라 사들였다. 삼성토탈 등 화학 계열사와 삼성테크윈 등 비주력 계열사는 한화그룹에 넘기는 ‘빅딜’도 성사시켰다. 주력 사업에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려는 전략이다.

재계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와병 중인 아버지를 의식해 전면에 나서지 않으면서도 물밑에서 조용히 변화와 혁신을 추진해왔다”며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어 삼성의 수익성 향상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주목된다”고 말했다.

남윤선 기자 inkling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