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너희가 FTA를 아느냐
노무현 정부가 ‘동북아 중심국가’를 기치로 내건 2003년이었다. 유럽연합(EU) 부집행위원장은 “한국은 FTA의 F도 모르는 나라”라고 조롱했다. 한국이 동시다발적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하자 내놓은 반응이었다. 사실 한국은 2002년 칠레와 FTA를 타결한 것 말고는 내세울 만한 실적이 없었다. 칠레 이전까지만 해도 세계무역기구(WTO) 회원국 중 FTA를 맺지 않은 나라는 몽골과 한국뿐이었다.

당시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한국의 무역 상대국들이 한국 시장에서 선점효과를 놓고 경쟁을 벌이도록 하는 ‘동시다발적인 FTA’ 전략을 택했다. 실제 2006년 한국이 미국과 FTA 협상 테이블에 앉자 3년 전 면박을 준 EU가 FTA를 맺자고 손을 내밀었다. 중국도 한국과의 FTA가 절실하다며 관심을 보였다.

조롱 대상에서 ‘허브’로 도약

그렇게 한국은 숨가쁘게 통상영토(FTA 상대국의 국내총생산 합계)를 확대하면서 ‘글로벌 FTA 허브’로 급부상했다. 지금까지 세계 3대 경제권인 미국, EU, 중국을 비롯해 총 15개국과 FTA를 타결했다. 한국의 통상영토는 전 세계 GDP의 74%(세계 3위)에 이른다. 중동의 이스라엘과 중남미 에콰도르 등도 최근 한국과 FTA를 조기에 체결하고 싶다는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얼마 전 중국과의 FTA 협상 타결을 이끈 우태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실장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페루(통상영토 1위)와 칠레(2위)의 순위가 왜 한국보다 앞서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고서다. “칠레는 수산물, 페루는 광물이 주산물이다. 이렇다 할 제조업이 없다. FTA 하기가 얼마나 좋으냐. 반면 한국은 제조업, 농업, 수산업이 다 있는 국가다. (이해관계자가 많아) FTA를 추진하기가 가장 힘든 나라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양국 간 이익의 균형만 맞추면 되는 FTA였다. 한국은 이제 ‘FTA 2.0’으로 불리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과 같은 다자간 FTA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다자간 FTA는 주요 2개국(G2)인 미국과 중국이 벌이는 경제패권 다툼과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미국이 TPP를 주도하는 가운데 중국은 아시아태평양자유무역지대(FTAAP) 구축으로 맞대응하고 있다.

양국간 FTA는 ‘절반의 성공’

한국이 협상전략 차원에서 한·중 FTA 타결을 지난달 베이징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이후로 미루려 하자 중국은 “절대 안된다(never)”며 정상회의 기간 내 타결을 밀어붙였다. 아직 TPP 협상에 참여하지 않은 한국을 품으며 TPP를 견제하려는 중국의 의도가 엿보인다. 미국 측도 다급해졌다. 중국과 FTA를 타결한 뒤 미국을 방문한 한국 측 통상 당국자들은 미국무역대표부(USTR)로부터 살가운 환대를 받았다.

한국은 기존 12개 TPP 협상국 중 일본과 멕시코를 제외한 10개국과 양자 FTA를 맺어 놨지만 느긋할 수만은 없다. TPP는 또 다른 규칙이 적용될 통상영토다. 12개국은 역내 어디에서 소재·부품을 조달하든 자국과 동일한 원산지로 인정받는 누적원산지기준 등 새로운 통상룰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로선 한국은 12개국 협상에 끼지 못하고 룰이 다 만들어진 후 가입해야 할 처지다. 다자간 FTA에서 실리를 최대한 챙기지 못하면 그동안 쌓아올린 양자 간 FTA는 ‘절반의 성공’일 뿐이다.

김홍열 경제부 차장 com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