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러시아 메밀 파동
‘바야흐로 1년 중 여름이 저무는 때였다. 올해의 수확량이 이미 결정된 시기, 이듬해의 파종에 대한 걱정이 시작되고 풀베기가 다가오는 시기, (중략) 철 이른 메밀이 무성하게 자라 땅을 뒤덮는 시기….’

톨스토이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한 대목처럼 늦여름과 초겨울에는 드넓은 메밀밭이 러시아 평원을 뒤덮는다. 메밀은 메마른 땅이든 추운 지역이든 가리지 않고 잘 자란다. 특별히 일손이 많이 필요하지도 않다. 생육기간 역시 2~3개월로 짧아 옛날부터 구황작물로 소중히 여겨져 왔다. 원산지는 시베리아 바이칼호 근처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평창 등 강원도 지역에 많이 자란다.

메밀은 러시아 사람들에게 블리니(팬케이크)나 시리얼을 만드는 주요 재료다. 아시아의 주식인 쌀과 같다. 단백질이 다른 곡류보다 많아 삶은 달걀의 81.4%에 이른다. 섬유소를 풍부하게 함유하고 있으며 모세혈관의 저항성을 키우고 고혈압으로 인한 뇌출혈 등 혈관 손상을 막는 루틴도 많이 들어 있다.

러시아인은 대부분 메밀가루로 블리니를 부쳐먹거나, 껍질 벗긴 낱알에 물을 붓고 버터와 소금을 섞은 카샤(죽)를 쑤어먹는다. 시인 알렉산드르 쿠프린은 블리니를 ‘태양처럼 뜨겁고 노란 황금빛이며 찬란한 날들, 풍성한 수확, 조화로운 결혼, 건강한 아이들의 상징’이라고 노래했다. 그만큼 국민의 사랑도 폭넓다. 메밀은 벌들에게 꿀을 제공하는 밀원식물이기도 하다. 메밀꿀은 짙은 호박색과 강한 향을 갖고 있어 미식가들에게 인기다. 메밀꿀 역시 러시아의 생산량이 세계 최대다.

그런데 러시아의 메밀값이 이달 들어서만 27.5%나 치솟았다고 한다. 올해 수확량이 줄어들 것이라는 소식에 일부 지역에서는 50~80%까지 급등했고, 1인 5봉지 이하의 ‘쿼터제’를 도입하는 곳도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이다.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서방국가들의 식료품 수출이 뚝 끊기는 바람에 상황이 더 악화됐다고 한다. 때아닌 메밀 파동으로 민심까지 흉흉해지는 모양이다.

식량 대란으로 정권이 뒤집힌 경우도 한둘이 아니다. 인도에서는 온 국민이 즐기는 양파 가격을 잡지 못해 총리가 두 번이나 바뀌었다. 올 들어서도 모디 총리가 가장 역점을 두는 정책이 양파와 설탕값 안정이다. 19세기 아일랜드의 감자 대기근만큼은 아니더라도 중국의 돼지고기 파동이나 한·중 간의 마늘 갈등 등 크고 작은 ‘먹거리 전쟁’은 끊이지 않는다. ‘식량 안보’라는 말에서는 섬뜩함마저 묻어난다. 하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하지 않나.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