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단통법과 넘버3
‘풀빵’은 통신업계 은어다. 보조금 혜택을 하나도 받지 못하고 휴대폰 비용을 모두(full) 낸, 그러고도 자신이 당한 줄 모르는 순진한 가입자를 뜻한다. 요즘 자주 등장하는 ‘호갱(호구+고객)’의 동의어다. ‘풀빵’ 잡은 날은 대리점 회식 날이다.

풀빵과 호갱이 양산되자 정부가 대책 마련에 나섰다. 가계 통신비를 줄이겠다는 대통령의 선거 공약까지 버무렸다. 주무 부처인 미래창조과학부는 발빠르게 각종 규제장치를 탑재한 법안을 만들었다. 법만 시행되면 가구당 통신비가 연간 50만~60만원 줄어들 것이라는 홍보(윤종록 미래부 2차관)도 곁들였다. ‘배 아픈 것(소비자 차별)’과 ‘배고픈 것(통신비 부담)’을 한꺼번에 해결해 줄 수 있다는 설명에 대부분의 국회의원은 찬성표를 던졌다. 단말기유통구조개선법(단통법)은 이렇게 탄생했다.

한달 만에 만신창이된 단통법

뚜껑이 열리자 환상은 단박에 부서졌다. 시행 첫날이었던 지난달 1일. 통신회사들이 공시한 보조금은 정부의 예상을 크게 벗어났다. 코끼리 비스킷 수준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소비자의 외면으로 판매점과 대리점 등 유통망도 싸늘히 식어 버렸다. 다급해진 정부는 쌍팔년도식 카드를 꺼내 들었다. 통신사와 휴대폰 제조사 최고경영자(CEO)를 이른 새벽 집합시켜서 ‘협조’를 당부했다. 보조금을 올리라는 압력이었다. 그러자 시장은 더욱 냉각됐다. 조만간 보조금 규모가 늘어나겠지라는 대기수요까지 더해진 탓이다.

급기야 지난 1일 밤엔 대규모 불법 보조금마저 다시 등장했다. 애플의 신제품 ‘아이폰6’ 가격이 10만원대까지 떨어졌다. 출시 첫날(지난달 31일) 밤새며 아이폰을 제값 주고 산 소비자들은 하루 만에 바보가 됐다. 차별을 막겠다고 만든 법이 새로운 차별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제 단통법에 우군은 찾기 힘들다. 진보와 보수로 갈라졌던 언론도 모처럼 대동단결하는 모습이다.

정부 규제 대신 시장에 맡겨야

멩거 미제스 하이에크 등 오스트리아학파라고 불리는 경제학자들은 1920~1930년대에 중앙 계획경제의 실현 가능성을 놓고 마르크스 경제학자들과 설전을 벌였다. 이른바 ‘계산 논쟁(calculation debate)’이다. 오스트리아학파의 주장은 명료했다. 세상은 너무도 복잡하고 가변적이기 때문에 중앙 정부가 모든 걸 틀어쥐고 판단하는 사회주의는 망할 수밖에 없다는 논지였다. 불가측한 세상의 변화에 수많은 경제 주체가 다양하게 반응하도록 놓아두는 자유시장이 가장 좋은 경제 체제라는 결론이다.

질서 정연할 것 같은, 그래서 예측 가능할 것 같은 물리학의 세계에서도 요즘은 불확실성을 근간으로 하는 양자역학이 대세다. 뉴턴 이래 언제 어느 상황에나 동일한 ‘계산 결과’가 가능하다고 여겼던 과학계의 고정관념은 이미 하이젠베르크 슈뢰딩거 등의 후학들에 의해 금이 간 지 오래다.

경제는 심리다. 물리학보다 예측력이 더욱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규제와 가격 통제를 통해 질서를 잡으려 했던 단통법은 그래서 무모하다. 1997년 개봉한 깡패영화 ‘넘버3’의 한 장면. 사우나에 걸터앉은 검사(최민식)가 옆자리의 조폭 간부(한석규)에게 점잖게 훈계를 한다. “한마디 충고하겠는데 네가 앞으로 뭘하든, 하지마라.” 정부에 이런 말을 해주고 싶은 사람, 요즘 많지 않을까.

안재석 IT과학부 차장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