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업 생태계의 활력이 떨어지고 있는 건 벤처의 부진에서도 엿볼 수 있다. 혁신형 기업의 상징과도 같은 벤처가 ‘조로증’에 걸렸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다.

1990년대 후반 등장한 1세대 벤처기업 가운데 지금 살아남은 곳은 절반도 안된다. 코스닥협회에 따르면 1998년부터 2001년까지 코스닥시장에 상장된 벤처기업 총 455개 중 217개가 시장에서 퇴출당했다. 메디슨, 핸디소프트, 로커스, 새롬기술 등이 쇠락의 길을 걸었다.

성공 사례로 인정받는 곳은 휴맥스, 한글과컴퓨터, 주성엔지니어링, 비트컴퓨터 정도다. 그러나 생존한 벤처들 중에서 대기업으로 큰 기업은 드물다. 한창 성장곡선을 타야 할 ‘맏형’ 벤처들이 퇴장하면서 한국 벤처업계가 급속히 늙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스마트폰 제조업체 팬택의 몰락은 상징적이다. 팬택은 1990년대 벤처 증흥기를 이끌며 한때 국내 벤처기업의 선두주자로 통하던 기업이다. 박병엽 팬택 전 부회장이 1991년 아파트를 팔아 마련한 4000만원으로 직원 5명과 일군 성공 신화는 벤처 창업자들에게 자극이 됐다. 그러나 팬택은 2007년 워크아웃에 들어간 데 이어 지난달 24일 인수합병(M&A) 공고를 내면서 외국 자본에 팔릴 위기에 처했다.

2·3세대 벤처의 역동성도 떨어진다. 10년째 제자리걸음인 국내 벤처기업의 평균 매출이 이를 보여준다. 중소기업청과 벤처기업협회에 따르면 국내 벤처기업의 평균 매출은 2002년 68억원에서 2012년 67억2000만원으로 줄었다. 반면 같은 기간 벤처기업 수는 1만1392곳에서 2만8135곳으로 증가했다. 1990년 벤처 태동기와 2000년 초 벤처 붐, 2006년 조정기를 거쳐 2010년 들어 벤처기업 수가 다시 늘어나는 재도약기에 접어들었지만 질적 성장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진단이다.

대기업과 비교하면 벤처의 성장 부진은 더 두드러진다. 삼성그룹 매출은 2005년 109조원에서 작년 278조원으로, 현대차그룹도 71조원에서 150조원으로 2배 이상 성장했다. 반면 국내 벤처기업 중 매출 1위를 기록한 정수기 렌털업체 코웨이의 매출은 2005년 1조80억원에서 작년 1조9300억원으로 증가하는 데 그쳤다.

세계 주요국가 기업 생태계의 역동성을 이끄는 건 벤처기업이다. 그런 점에서 국내 벤처의 부진은 장기적으로 한국 산업의 엔진이 꺼져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남민우 벤처기업협회장은 “팬택 등의 몰락을 보면서 도전정신을 가진 벤처 기업가들이 갈수록 사라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별취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