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서류 쓸 때마다 文 떼어버리고 싶다"
서울 소재 대학의 경영학과 4학년인 박모씨는 졸업을 연기할지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5학점만 채우면 내년 2월에 졸업할 수 있지만 바늘구멍 같은 취업문을 통과할 자신이 없어서다. 지난해만 해도 소수지만 인문계 출신을 뽑던 대기업들이 올 하반기 공채 때는 이공계 출신만 선발하고 있다.

박씨는 “경영학과를 나오면 취업 걱정 안해도 된다는 건 모두 옛말이 됐다”며 “은행 외엔 갈 곳이 없어 자연과학이나 공학을 복수전공하지 않은 걸 후회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문계 외면하는 기업 수두룩

하반기 대졸 취업시장에서 문과 출신의 취업난은 어느 때보다 심하다. 22일부터 26일까지 입사 원서를 받는 삼성그룹 계열사 중 인문계 출신을 선발하지 않는 곳은 6개나 된다. 삼성전기는 이번 공채에서 연구개발직만 모집한다. 전공은 전자전기·기계·재료금속·화학 등 이공계로 한정했다. 인문계 출신이 지원하는 영업과 경영지원 분야는 모집 공고에서 빠져 있다. 삼성디스플레이도 연구개발직과 소프트웨어 직군에서만 신입사원을 뽑는다. 삼성테크윈과 삼성종합화학, 삼성BP화학, 삼성바이오에피스도 이공계 전공자만 선발한다.

이공계 우선 채용은 확산되는 추세다. LG디스플레이와 LG화학, 포스코ICT 등도 지난해엔 인문계 출신을 일부 모집했지만 올해엔 뽑지 않기로 했다. 지난 18일 원서 접수를 마감한 LG화학은 이공계 학사 출신만 채용했다. LG디스플레이도 공정 장비 분야에서 전자전기·화학·기계공학 전공자만 모집했다.

한 대기업의 인사팀장은 “이공계는 대졸 신입사원 위주로 선발하고, 인문계는 다른 기업에서 검증된 경력사원 중심으로 뽑고 있다”며 “이런 현상이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인문계 외면 현상이 두드러지자 취업준비생들 사이에선 이른바 ‘중경외시(중앙대 경희대 한국외국어대 서울시립대)’ 이공계가 ‘SKY(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상경계보다 낫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문과생이 취업하려면 공학을 복수전공해야 한다”는 얘기도 공공연히 하고 있다.

◆문과 출신 경쟁률은 천정부지

"입사서류 쓸 때마다 文 떼어버리고 싶다"
인문계 전공자들에게 취업문을 열고 있는 기업의 신입사원 경쟁률은 치솟고 있다. 은행권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1만8000명이 지원한 우리은행엔 올해 사상 최대인 2만5000명이 몰렸다. 작년 하반기에 1만6000명이 응시한 국민은행에도 올해엔 2만명이 지원했다. 지난 4월 끝난 농협의 상반기 6급 공채엔 은행권 역대 최대인 4만명이 원서를 냈다.

"입사서류 쓸 때마다 文 떼어버리고 싶다"
서비스업이라는 특성상 인문계 출신 위주로 선발하는 롯데그룹에도 사상 최다 인원이 취업문을 두드렸다. 지난해 5만5000명이 원서를 썼지만 올해엔 5000명 이상 늘어난 6만여명이 지원했다. 롯데백화점은 지난해 신입사원 공채에서 95%를 인문계 출신으로 뽑았다.

지난 18일 지원서를 마감한 이랜드 전략기획 분야에도 7700여명이 지원해 100 대 1을 훌쩍 뛰어넘는 경쟁률을 기록했다. 광고대행사 이노션의 경쟁률은 150 대 1이었고 렌터카 1위 회사인 KT렌탈의 경쟁률은 245 대 1이었다.

취업문이 좁다보니 인문계 출신들은 영업으로 몰리고 있다. 기업들이 전공 불문하고 뽑는 부문이 사실상 영업밖에 없어서다. 영업맨을 선발하는 방식은 갈수록 깐깐해지고 있다. 영업능력을 파악하기 위해 심층 면접을 보는 곳이 늘고 있다. LG전자는 한국영업본부 지원자들의 역량을 평가하기 위해 1박2일 면접을 한다.

유희석 서강대 취업센터장은 “인문계 출신들이 취업에 성공하려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B2B(기업간거래)에 특화된 기업 등 히든 챔피언을 발굴할 필요가 있다”며 “알짜 중견·중소기업에 입사 한 뒤 3~4년 경력을 쌓아 대기업으로 가는 사람도 많다”고 조언했다.

공태윤/정인설 기자 true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