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벤처 망치는 국가 R&D
임현수 전 위인터렉티브 대표(34). 중증 뇌성마비 장애를 딛고 고등학생 때부터 각종 컴퓨터 대회와 창업경진 대회를 휩쓸었던 벤처기업가다. 포천은 2010년 그를 ‘IT업계의 앙팡테리블(무서운 아이)’로 선정하기도 했다. 그가 창업한 지 6년 된 위인터렉티브를 최근 폐업했다. 잘 나가던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1급 지체·언어 장애도, 경쟁사도 아니었다. 국가 연구개발(R&D) 과제였다.

2008년 창업 초기부터 그는 국가 R&D 과제를 꾸준히 신청했다. 그 지원금으로 최고의 개발자들을 뽑았고, 아이템 세 개를 잇따라 실패해도 꿋꿋이 버텼다. 그러나 2012년 1억3000만원을 지원받은 R&D 과제 하나가 나중에 중복 판정을 받으면서 꼬이기 시작했다. 이미 다 쓴 돈을 토해내는 과정에서 부채의 늪에 빠져 버렸다. “국가 R&D 자금에 안주하지 말고 단돈 몇 백만원이라도 내 손으로 벌었어야 했는데…”라고 후회했을 땐 이미 개인파산 상태였다.

'눈먼 돈'만 챙기는 좀비 벤처

유망 벤처의 기술개발을 돕겠다고 만든 국가 R&D 자금이 기업을 병들게 하는 마약이 돼 버린 것은 아이러니다. 이런 모순은 국가 R&D 자금이 ‘눈먼 돈’처럼 운영되기 때문이다. 임 전 대표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주로 교수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은 사업성은 전혀 보지 않고, 오로지 페이퍼상의 기술만 본다. 이 때문에 과제를 따기 위한 공식이 존재한다. 사업 아이템과 무관하지만 과제를 따기 위한 제안서를 내는 기업이 많다. 이렇게 과제를 따낸 기업들은 좀비처럼 생명만 붙어 있는 상태로 사업을 하기 때문에 부채만 쌓인다.”

그러다 보니 국가 R&D 자금은 유망 벤처기업보다는 벤처캐피털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회사들이 차지하기 일쑤다. 진짜 실력 있는 벤처기업은 국가 R&D 과제에 지원조차 하지 않는다. 자금을 지원받은 뒤 따라오는 정부 간섭이 싫어서다. 국가 R&D 자금의 ‘역선택’이 발생하는 것이다.

중소·벤처기업이 신청해 쓸 수 있는 국가 R&D 자금은 지난해 기준 2조2000억원에 달했다. 전체 국가 R&D 자금 17조원의 13% 규모다. 이렇게 엄청난 돈이 매년 쏟아지다 보니 파리들이 꼬이지 않을 리 없다. 국가 R&D 자금을 받게 해주는 전문 브로커가 등장하고, 이렇게 받은 돈은 허위 장비 구입, 인건비 과다 책정 등으로 빼돌려진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최근 4년간 적발한 국가 R&D 자금 부정 사용 행위만 265건에 달한다.

R&D 예산을 벤처캐피털에

물론 국가 R&D 자금을 지원받은 곳이 모두 좀비 기업이나 사기꾼은 아니다. 그 돈으로 경쟁력 있는 기술을 개발하고, 사업화에 성공한 기업도 적지 않다.

그러나 국가 R&D 자금의 운영 방식은 획기적으로 고쳐야 한다. 미국 등 선진국은 국가 R&D 자금을 개별 기업엔 거의 지원하지 않는다. 정부 예산은 특정 기업이 아니라 여러 기업에 혜택이 돌아가는 공익적 목적에 써야 한다는 원칙 때문이다. 개별 기업이 아닌 기업 컨소시엄이나 대학 연구소 등에 지원을 집중하는 이유다.

“차라리 국가 R&D 과제를 없애 버리고 그 돈을 벤처캐피털에 주자. 벤처캐피털은 최소한 사업성을 평가하고 투자할 것이고, 창업자는 지분을 주는 것이니 신중히 투자받을 것이다.” 좀 과격하지만, 국가 R&D 자금의 피해자인 임 전 대표의 제안도 귀 기울일 만하다.

차병석 IT과학부장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