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산골짜기 마을에서 ‘금성 라디오’를 통해 우리나라 국가대표팀 청룡의 축구를 관전하던 (?) 시절인 1970년대의 이야깁니다.

중계 아나운서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 한 선수에 대해 녹음기처럼 매번 똑같이 활약상을 전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한국의 ‘차보옹 선수’ 단독 드리볼 ! 강슛 ! 고링, 고링, 고링 입니다. 와와와...”

그로부터 40년여 세월이 흐른 2014년 6월 8일 일요일 자정을 앞둔 시간에 당시 라디오에서 ‘차보옹’으로 들었던 주인공이 국내 지상파 TV (SBS 2014 브라질 월드컵 특집)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아들인 두리와 함께.

그는 독일에서 지금도 ‘차붐’으로 크게 환대 받는 대한민국 축구의 전설 ‘차범근’ 입니다. 차붐은 분데스리가에서 10년여 시즌을 뛰며 총 98골을 기록했지요.

차범근은 이날 방송에서 SBS 배성재 아나운서와 독일을 방문, 그가 과거 분데스리가로 이적해 처음으로 뛴 프랑크푸르트의 지하철에 내걸린 ‘팀 역대 베스트 11’ 사진을 감상합니다.
/가운데가 차범근 위원의 허벅지= SBS 화면 촬영
/가운데가 차범근 위원의 허벅지= SBS 화면 촬영
사진엔 어떤 선수도 따라오지 못할 ‘탄탄하고 굵직한 허벅지’[위 사진의 가운데 =TV화면 스마트폰 촬영]가 드러나고 있고요. 차범근은 “지금 봐도 감동인데...”라며 일종의 나르시시즘에 젖습니다.

차범근은 프로그램에서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의 대표팀 감독에서 중도 하차케 한 주역이자 우리 대표팀을 이끌고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4강 신화를 이뤄낸 거스 히딩크와 조우해 ‘옛 일’을 반추했습니다.

특히 현재 분데스리가 레버쿠젠에서 활약 중인 국가대표 에이스 손흥민과 만나선 ‘지는’ 별과 ‘떠오르는’ 별의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었습니다.

구자철과 함께 발가락 부상으로 병원에 입원한 박주호를 만나 격려하며 축구의 덕목을 강의하기도 했습니다. “선배가 항상 후배를 챙겨야 한다.”

아무튼 대한민국 축구의 살아 있는 전설 차범근 덕분에 한국 축구 팬들은 독일 축구에 대해 비교적 호의적 입니다. 무엇보다 ‘전차군단’을 트레이드 마크로 한 독일 축구 대표팀은 매우 강하기도 하고요. 독일대표팀은 월드컵에서 항상 “우승 후보”란 타이틀을 떼지 않습니다.
/2014 브라질 월드컵 공인구 브라주카=아디다스 코리아 제공
/2014 브라질 월드컵 공인구 브라주카=아디다스 코리아 제공
독일팀은 특히 ‘축구니까 일어날 수 있는 현실’을 상징하는 명언 “공은 둥글다”를 남긴 것도 우리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은 배경입니다.

이 말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우승한 서독 (독일) 대표팀의 제프 헤어베르그 감독의 입에서 나왔지요.

세계 제2차대전 패전국인 서독팀은 이 대회 결승에서 푸스카스로 대표되는 공산국가 헝가리 대표팀과 만나 혈전 끝에 3 : 2 스코어의 승리를 거두고 월드컵 대회 참가 사상 처음으로 우승컵을 거머쥐었습니다.

헤어베르그 감독이 이 말을 한 배경이 흥미로운데요. 서독팀은 스위스 월드컵 예선 경기에서 헝가리팀과 만나 큰 망신을 당했습니다. 3골을 넣기는 했지만 무려 8골이나 내주며 '대패'한 것입니다.

때문에 양팀 간 결승을 앞두고선 당연히 “헝가리팀의 절대 우세”가 예상됐습니다. (당시 스위스 월드컵에 처녀 참가한 한국 축구대표팀은 예선에서 헝가리에 무려 9골이나 내줬습니다. 산도르 콕시스라는 선수가 이경기에서 헤트트릭을 기록했고요.

한국과 헝가리의 9골 차는 지금까지의 역대 월드컵 최다 점수차 기록으로 남아 있을 만큼 헝가리는 '무시무시한' 팀으로 꼽혔습니다.)

사정이 그러함에도 헤어베르그 감독은 결승전에 앞서 “공은 둥글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서독은 헝가리를 꺾고 '대이변'을 연출했고요. 이 후 "공은 둥글다"는 축구에서 '이변'의 대명사처럼 굳어졌습니다.

둥근 축구공은 상대방이 아무리 강한 팀이라고 해도 '주사위처럼' 굴러가다 골문 앞에서 딱 멈출 리가 없는 까닭이지요.

12년 전 2002년 한일월드컵도 독일 대표팀의 강한 인상을 심은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독일은 이 대회 때부터 조별 예선 첫 경기에서 ‘4배수’의 골을 넣는 가공할 공격력 신화를 선보인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이들은 추풍낙엽의 신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獨風落葉’.

예컨대 독일대표팀은 2002년 한일 월드컵 사우디아라비아와 첫 경기에서 무려 8골을 몰아치며 한국이 월드컵에서 갖고 있는 ‘기록’을 깰 뻔 했지요. 8 대 0 승리.

자신 안방에서 열린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선 코스타리카를 첫 상대로 해 4골을 집어 넣었습니다. 4 대 2 승리.

4년 뒤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선 예선 첫 경기 상대로 한국대표팀 감독을 지낸 핌 베어벡 감독이 이끈 호주와 만나 네 방의 골 세례를 퍼부었습니다.

당시 호주팀은 지역 예선에서 1골 밖에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수비가 강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4 대 0 승리.

이 때문에 월드컵 열리기 전 조추점 과정에서 가끔 이런 말이 나돌곤 합니다. “독일과 한 조에 편성되지 않기를 빌어라. 불운하게도 한 조에 편성됐다면 첫 경기 상대만은 피하라.”

6월 13일 개막하는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FIFA랭킹 2위의 독일은 포르투갈, 가나, 미국과 함께 G조에 편성됐지요. 흔히 이 조를 ‘죽음의 조’라고 부르고 있는데요.

그런데 한국시간 6월 17일 새벽 1시에 벌어지는 첫 경기 상대가 만만찮습니다. 호나우두로 대표되는 포르투갈 대표팀과 일전을 치루기 때문입니다. “독일이 첫 경기 4배수 골의 신화를 이어갈 수 있을까요?”

한경닷컴 뉴스국 윤진식 편집위원 jsy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