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복원력 무너진 한국금융
믿기 어렵지만 예고된 참사였다. 세월호는 무모한 증축과 과적으로 복원력이 훼손돼 물에 떠 있기도 버거운 배였다. 본연의 기능을 잃자 거대한 여객선도 일엽편주에 불과했다. ‘맹수처럼 빠르고 거칠다’는 맹골수도의 물살에 어이없이 뒤집히고 말았다. 수장된 청춘들의 꿈에 비통해하다 언제부턴가는 두려움을 마주하고 있다. 제 기능을 상실한 게 세월호만은 아니라는 진실을 구조과정의 난맥상에서 또렷이 확인했기 때문이다.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보니 한국 금융산업도 예정된 침몰의 길을 걷고 있다는 생각에 아찔해진다. 복원력을 잃은 배처럼 금융업의 존립기반인 ‘신뢰’가 빠르게 무너지고 있어서다.

침몰의 길 걷는 금융산업

잇단 사건 사고에서 기본을 망각한 금융의 민낯을 볼 수 있다. 적자를 흑자로 둔갑시킨 분식회계가 들통나며 2년여 전 저축은행이 무더기 퇴출된 게 신뢰 추락의 도화선이었다. 증권사들은 웅진 동양 등 부실기업의 채권과 어음을 무책임하게 팔아 공분을 샀다. 채권을 위조하는 기상천외한 수법으로 고객돈을 빼돌린 은행원도 등장했다. 올 들어 신용카드회사에서 사실상 전 국민의 개인정보가 유출되자 불신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신뢰의 위기는 실적에 짙은 그림자를 지웠다. 지난해 은행의 자기자본이익률(ROE)은 2.8%로 추락, 국채이자에도 못 미쳤다. 그나마 이익의 89%는 예금과 대출 금리의 차이인 예대마진에서 나왔다. 은행의 위상과 동일시되던 ‘지점 수’가 이제 ‘리스크의 크기’라고 할 만큼 패러다임이 급변 중인데도 ‘면허 장사’ 외에는 별로 한 일이 없다는 의미다.

증권사들은 요 몇 년이 ‘외환위기 때보다 힘들다’며 아우성이다. 작년에는 코스피지수가 2000을 넘나들었지만 10년 만에 적자로 전환했다. 삼성생명이 인력 20% 감축에 나서야 할 만큼 보험업황도 시계제로다.

모피아와 대리인의 공생 끝내야

해법을 제시해야 할 금융당국 수장들은 자리보전과 책임회피에 급급한 모습이다. 우왕좌왕하다 선장이 슬며시 탈출해버린 세월호 못지않은 리더십의 공백이다. 정책금융공사를 산업은행에서 떼냈다 다시 통합하는 과정의 엉성함은 무소신을 잘 보여준다. 한 관계자는 “5년 만에 핵심정책이 왔다 갔다 한 건 시장효율보다 통제권 유지에만 골몰한 관료와 국회의원들이 담합한 결과”라며 허탈해했다.

철학과 상상력 결핍 탓에 임기응변식 규제를 남발하다 보니 정책신뢰도는 바닥이다. 한 전직 장관은 “가계부채 대책이라며 퇴직자의 신용카드 연장을 금지한 탓에 연금 수입이 꽤 되는데도 카드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무엇보다 쏟아지는 비판에도 여전한 ‘낙하산’ 인사가 금융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주범이다. ‘감사 보낼 테니 자리 비워두라’며 노골적으로 통보하는 게 요즘 풍속도다.

세월호의 비극은 통제받지 않는 권력에서 잉태됐다. 회사 내 ‘예스맨’과 ‘해피아’들은 타락한 자본 권력에 복종하고 기생하는 길을 택했다. 요즘 금융시장의 풍경도 비슷하다. ‘규제 본색’의 모피아, 그 권력에 편승한 대리인과 하수인, 이권이 우선인 금융맨들이 득세하고 있다. 그들 간 공생의 고리를 끊지 못한다면 머지않아 한국 금융의 침몰을 목도하고 비분강개하는 순간을 맞게 될 것이다.

백광엽 금융부 차장 kecor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