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권위에 대한 복종
카드 정보유출 사건이 본격 확대되기 시작한 지난 1월22일. 점심을 함께한 최수현 금융감독원장은 연신 답답하다는 표정이었다. KCB 직원이 카드 정보를 유통시키지 않아 실제 피해는 없을 것이란 말에 기자가 흔쾌히 동의하지 않아서였다.

기자는 “유출된 지 수개월이 지났는데 유통되지 않았을 것이란 얘기를 누가 믿겠느냐”고 했다. 최 원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아니, 대한민국 검찰을 믿어야지 누굴 믿겠습니까.” 검찰이 ‘2차 유출 피해는 없다’고 공식 발표한 것을 신뢰하는 게 순리라는 얘기였다.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대한민국 검찰’을 의심하느냐는 반응에 할 말을 잃어서였다.

2차 피해가 사실로 확인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난 14일 8270만건이 유출됐다는 뉴스에 기자는 ‘그러면 그렇지’했다. 쓴웃음이 자신도 모르게 나왔다.

들통난 카드정보 유통

금감원장의 입장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국민 불안 확산을 막는 게 사태 수습의 방도라고 판단했을 수 있다. 피의자 진술에만 의존해 2차 피해가 없었다고 한 검찰이 기본적인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검찰 수사 결과를 토대로 정부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한계도 있다. 하지만 사태 확산 방지에 급급한 나머지 사건의 본질을 축소해석하려는 안이한 판단은 없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금융감독당국은 이후 금융사 정보보호 대책을 매일같이 내놓았다. 직원들은 근본적 대책을 마련하느라 야근을 밥먹 듯했다. 검찰이 아닌 금융감독당국이 본래의 ‘권위’를 다시 세워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이 간부들 얼굴에서 읽혔다.

이런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또 벌어졌다. 카드 정보유출 사건이 봉합되기도 전에, 이번엔 감독당국 내부 한가운데서 비위사건이 터져 나왔다. 3100억원대 ‘KT ENS 대출 사기’ 사건 주범을 금감원 간부가 도왔다는 경찰 발표가 금감원 전체를 뒤흔들었다. 이 간부는 과거 금감원 노조위원장을 지낸 사람이다. 금감원 내 각 부서에 다양한 인맥을 갖고 있는 인물이라고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피의사실이다. 감독당국 간부의 검은 커넥션에 대한 의혹은 크고 작은 금융사고의 단골 메뉴였지만, 이번에도 사실로 확인됐다.

복종하고픈 권위 만들어야

스탠리 밀그램 미국 예일대 심리학과 교수가 1961년 쓴 ‘권위에 대한 복종(Obedience to authority)’이란 책은 당시 심리학계에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다. 사람들은 권위 앞에서는 이성적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순종하게 된다는 사실을 실험을 통해 입증하고 책으로 소개했다.

이때의 권위는 사실 ‘권력’과도 통하는 말이다. 권력 앞에서 자신의 관점과 가치를 지키기 쉽지 않다. 30년 전 배경이긴 하나, 영화 ‘변호인’에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한편으론 영화관을 나서며 ‘지금 세상은 많이 나아졌지’라고 혼잣말한 이들도 적지 않았을 테다. 세상은 조금씩이라도 개선되고 있다는 믿음을 가진 이들이다.

금감원장이 ‘대한민국 검찰’의 권위를 빌린 것은 이런 사람들에게 호소한 측면이 컸다. 좋게 말해 호소다. 검찰 발표를 그냥 믿으라는 복종의 강요였다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복종해도 좋으니, 그런 마음이 생기게 하는 훌륭한 권위를 한국 사회에서 찾아볼 순 없을까.

장규호 증권부 차장 daniel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