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진단]민족기업 유한양행 ‘뜻밖’…부의 세습 자손들 ‘친일 족쇄’ 못벗어









김신기자(skim@skyedaily.com)



기사입력 2014-02-28 13:37:46































우리나라 4대 국경일 중 하나인 ‘3.1절’은 일제의 갖은 압박과 수탈속에서 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한 만세운동을 벌인 자주독립 정신을 기리기 위해 지정된 날이다. 과거 일제시대 대부분 독립운동은 사회지도층이나 지식인층에서 주도했지만 ‘3.1운동’ 의 경우 모든 시민이 참여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지녀 그 의미는 더욱 높게 평가된다. ‘3.1절’을 논할 때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는 유관순 열사 또한 3.1운동 당시 17세의 어린 나이로 참여했으며, 이듬해 감옥에 수감돼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자주독립의 뜻을 굽히지 않아 결국지만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올해도 우리 선조들의 민족정신을 기리고,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가슴에 새기는 ‘3.1절’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올해로 95주년을 맞는 ‘3.1절’은 우리나라가 아베 총리의 극우 행보와 독도 문제 등으로 일본과 첨예한 이념적 대립 각을 세우고 있는 가운데 맞이하는 것이어서 그 어느때 보다 소중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재계에는 3.1절, 광복절 등 일제시대 우리 선조들의 민족정신을 기리는 국경일이 그리 달갑지 않은 몇몇 기업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 장수기업으로 불리며 오랜 시간 국가 경제 성장에 이바지 한 공로를 인정받으며 승승장구했지만 과거에 벌인 ‘친일행각’으로 ‘친일기업’이라는 낙인이 찍힌 기업들이다. 대부분의 친일 행각이 ‘일제의 압력에 의해 어쩔수 없는 행동이었다’고는 하지만 주권을 뺏긴 국가의 자주 독립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선조들이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들의 항변은 그저 변명으로 치부되고 있다. 스카이데일리가 3.1절을 맞아 재계의 친일기업 면면을 조사해 봤다.<편집자 주>








3·1절에…친일 유한양행·두산·삼양사 승승장구


▲ 민족기업·애국기업 등으로 알려진 유한양행은 깨끗한 기업이미지를 통해 꾸준한 성장세를 달성해 왔다. 하지만 최근 고 유일한 박사의 동생인 유명한 전 사장의 친일 행위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던졌다. 사진은 유한양행 본사 젼경. ⓒ스카이데일리

민족기업·애국기업 유한양행, 알고 보니 친일 행위 가담





지난 1926년 고 유일한 박사가 설립한 기업인 유한양행은 창업주가 독립운동에 관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애국기업이라는 명성을 얻은 기업이다. 더욱이 유일한 박사가 세상을 떠나며 기업을 대물림 하지 않고 사회에 환원한 사실이 알려자면서 ‘민족기업’ 이라는 이미지에 ‘착한기업’이라는 긍정적인 부분까지 더해졌다.





유한양행의 이러한 깨끗한 이미지는 국민들의 뇌리에 새겨지며 제품 등에 대한 신뢰로 이어졌고, 이를 통해 안정적인 수익기반을 다지는 동시에 꾸준한 성장을 구가해왔다.





하지만 애국기업으로 널리 알려진 유한양행의 오너 일가가 과거 일본군에 비행기 제작비를 헌납한 것으로 확인돼 국민들에게 충격을 던졌다. 이런 사실은 유한양행 창업주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유일한 박사의 친동생 유명한 전 사장이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면서 알려졌다.







3·1절에…친일 유한양행·두산·삼양사 승승장구


▲ 자료: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 ⓒ스카이데일리

1908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난 유명한 전 사장은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1941년 12월 유한양행주식회사의 사장에 취임했다. 유명한 전 사장은 취임 직후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폭격한데 이어 홍콩을 함락시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종로경찰서를 통해 ‘유한 애국기’ 1대의 제작비를 일본 육군에 헌납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친일파의 기준으로 삼는 ‘국방금품 헌납자’에 해당되는 경우로,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일본의 침략전쟁 수행을 돕기 위해 1만원 이상의 금품을 헌납한 자’를 친일파로 분류하고 있다.





과거 일본은 유한양행의 창업주인 유일한 박사가 미국에서 학교를 다녔다는 이유와 기업명인 ‘양행(洋行)’을 문제 삼아 유한양행을 미국계 회사로 낙인 찍고 핍박을 가했다. 진주만 공습 직후 간부사원 전원을 종로경찰서에 연행하기도 했으며, 5년여에 걸친 혹독한 세무조사로 끊임없이 회사의 목줄을 조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유한양행의 창업주인 유일한 박사가 수출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 출국했다가 2차 세계대전이 터지는 바람에 미국에 발이 묶인 상태에서도 열정적인 항일 독립운동을 펼친 것은 여전히 재계의 유명한 일화로 남겨져 있다.





그러나 동생인 유명한 전 사장의 친일 행위는 비록 회사를 존속시키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고 할지라도 비난을 피하기는 어려우며 유한양행의 깨끗한 이미지에 오점을 남길만한 행적이라는 평가다.





‘친일기업’ 꼬리표에 고개 숙이는 ‘삼양그룹’







3·1절에…친일 유한양행·두산·삼양사 승승장구


▲ ‘삼양그룹’은 ‘친일기업’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 마다 빼놓지 않고 거론되는 기업 중 하나다. 이는 삼양그룹의 창업주인 고 김연수 회장이 행한 과거의 친일 행각 때문이다. 사진은 삼양그룹 본사 전경. ⓒ스카이데일리

‘삼양그룹’은 ‘친일기업’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 마다 빼놓지 않고 거론되는 기업 중 하나다. 선대의 과오를 후대에 짊어지게 하는 것은 일견 가혹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부의 세습이 이뤄지는 재계 특성상 ‘친일’의 과거는 기업이 존속하는 한 떼어낼 수 없는 꼬리표라는 지적이다.





삼양그룹의 창업주인 고 김연수 회장은 일본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뒤 국내 기업에 근대적 경영기법을 처음 도입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1924년 삼양그룹을 설립한 이후 1961년 전국경제협의회(전국경제인연합회 전신) 회장을 맡는 등 재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3·1절에…친일 유한양행·두산·삼양사 승승장구


▲ ⓒ스카이데일리

하지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이하 친일반민족위)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일본에 국방헌금을 납부하고 학병권유 연설을 한 사실이 알려졌다. 더욱이 김연수 회장은 1941년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관인 중추원 참의로 임명돼 해방될 때까지 활동했다.





그는 중추원 회의에서 “일본정신의 체득, 황도정신의 삼투를 통해 정신적 방랑자인 반도 민중을 구제·재생시키자”는 취지의 참의답신서를 제출하기도 했으며 총독부 시국대책조사위원, 만주국 명예총영사, 국민총력연맹 후생부장, 조선임전보국단 간부 등의 ‘일제 직함’도 보유했었다.







3·1절에…친일 유한양행·두산·삼양사 승승장구


▲ 자료: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 ⓒ스카이데일리 <도표=최은숙>

이 같은 사실이 널리 퍼지면서 삼양그룹은 광복 후에도 ‘친일기업’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다. 김연수 회장은 1948년 시작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로부터 “상황상 어쩔 수 없다”는 정상참작으로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친일반민족위는 2009년 일제에 적극 동참했다는 이유로 김 창업주를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규정했다.





김연수 회장의 후손들은 지난 2009년 친일파 결정을 취소해 달라는 행정 소송을 제기했지만 이듬해인 2010년 법원은 “김 창업주의 친일행위가 인정된다”며 원고 패소 판정을 내렸고, 김 회장은 여전히 친일파 명단에서 이름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유관순 열사 내용 누락된 교과서, 과거 친일행위 논란 ‘두산’







3·1절에…친일 유한양행·두산·삼양사 승승장구


▲ 고 박승직 두산그룹 창업주의 친일 행위 가담으로 ‘친일’ 낙인이 찍힌 두산그룹은 최근 계열사인 두산동아 역사교과서에서 고 유관순 열사에 관한 내용이 빠진 사실로 또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선 바 있다. 사진은 두산그룹 본사 전경. ⓒ스카이데일리

고 박승직 두산그룹 창업주가 1896년 설립한 두산그룹은 올해로 118년의 역사를 맞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이지만,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친일기업’ 이라는 굴레를 썼다.





특히 최근 두산그룹의 계열사인 두산동아 역사교과서에 고 유관순 열사에 관한 내용이 빠진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을 일으킨 바 있어 이번 3.1절은 두산그룹에게 더욱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실정이다.









3·1절에…친일 유한양행·두산·삼양사 승승장구


▲ ⓒ스카이데일리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박승직 창업주는 1800년대 후반 맨손으로 시작해 거상의 자리에 올랐고, 상업계의 유력자로서 한성상업회의소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한 뒤 상의원, 상임위원 등을 맡았다.





하지만 그는 1909년 안중근 의사에게 처단된 이토 히로부미를 추도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대추도회의 발기인과 위원을 맡으며 친일 행각을 벌였다. 또 1922년에는 조선실업구락부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이후 평의원 등의 임원을 지냈다. 조선실업구락부는 1920년 친일파의 거두 이완용의 외조카 한상룡 등 유력 경제인들이 친목을 도모를 위해 결성한 단체다.











3·1절에…친일 유한양행·두산·삼양사 승승장구


▲ 자료: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 ⓒ스카이데일리

또 박승직 창업주는 반일운동 배척과 일선융화를 표방하던 친일단체 동민회의 평의원을 맡았고, 사회 저명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일제의 만행에 대해 찬사하는 내용의 발언을 자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그는 일본 해군 국방헌금을 수시로 헌납한 사실도 추가로 밝혀져 도마 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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