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기업판 빅토르 안
러시아로 귀화한 빅토르 안(안현수)은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직접 훈장을 달아주면서 “쇼트트랙의 탁월한 거장 빅토르 안은 조국에 4개(금3·동1)의 메달을 안겨주고 수백만 명이 쇼트트랙을 사랑하게 했다”고 치켜세웠다.

대한민국 출신 선수가 러시아 영웅으로 바뀌는 장면을 지켜보는 기분은 씁쓸하다. 귀화 이유를 둘러싼 ‘폭풍 논란’에도 불구하고 진실은 안갯속에 묻혀 있다. “파벌주의와 줄 세우기, 심판 부정 등 부조리와 구조적 난맥상에 의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으로 그저 미뤄 짐작해볼 뿐이다.

1등 끌어내리기 산업계도 만연

얼마 전 만난 재계 인사는 “빅토르 안 논란을 보면서 국내 기업들이 처한 상황이 오버랩됐다”고 말했다. “한국 사회의 고질병인 1등 끌어내리기 행태가 떠오른다”는 것이다. 그는 1등을 유치하려는 선진국과 달리 1등의 독주를 막기 위한 ‘규제 창조’에 열을 올리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지난 몇 년간 정치권은 국내 대표기업들에 족쇄를 채우기에 바빴다. 납품단가 후려치기, 일감 몰아주기, 골목상권 침탈, 통행세, 갑을 관계, 1% 대 99% 등은 정치권이 만들어낸 창조적(?) 용어들이다. 삼성 현대자동차 LG SK 롯데 등 각 분야의 ‘국가대표급’ 기업들은 순환출자·금산분리·지주회사·일감 과세·경직된 노동관계법·중소기업 적합업종·대형마트 규제 등으로 손발이 묶여 있다.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투자해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데도 특혜라는 벽에 부딪히기 일쑤다. 한진그룹(대한항공)이 경복궁 근처에 지으려는 7성급 호텔은 관광진흥법 개정안의 국회 처리가 늦어져 표류 중이다. 한진이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진행 중인 73층짜리 월셔 그랜드호텔 재건축 사업과 대비된다. 공사기간에 1만1000개 일자리가 창출된다고 한다. LA는 최대 7900만달러의 세금 면제로 투자에 화답했다.

투자·고용 막는 대기업 특혜 시비

국내 대기업의 손자회사와 외국업체 간 합작투자를 가능케 한 외국인투자촉진법(외촉법) 개정안도 마찬가지다. 대규모 투자와 함께 많은 일자리가 생겨나 지역주민들까지 발벗고 나섰는 데도 특정 대기업 봐주기라는 시비로 수년을 끌다 간신히 국회를 통과했다. 미국 앨라배마주는 현대차 공장을 유치하기 위해 주정부 헌법까지 고쳐 외국인 토지소유 제한 규제를 풀고 농지를 공업용지로 바꿨다.

최근 경제를 살리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박 대통령은 ‘경제혁신 3개년 계획 담화문’에서 “천추의 한을 남겨선 안된다”는 다소 격한 표현을 써가며 경제활성화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내보였다. 경제가 꿈틀대기 위해선 민간이 마음놓고 뛸 수 있는 운동장이 있어야 한다. 쓸데없이 규제 호루라기를 남발해 경기를 중단시키는 관행은 사라져야 한다.

비즈니스 전쟁에 나설 국가대표 기업들을 최대한 많이 키워야 경제혁신도 가능하다. 무한경쟁의 세계에서 영원한 승자는 없기 때문이다. 필름 신화의 코닥, 전자업계의 강자 소니, 휴대폰 공룡 노키아의 쇠락이 이를 잘 보여준다. 지금처럼 대기업 혐오증이 확산되면 대표기업들이 해외로 탈출하는 ‘기업판 안현수 사태’가 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

이건호 산업부 차장 leek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