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번역원과 함께하는 인문학 산책] 충정과 아첨 사이
살다 보면 뜻하지 않은 오해를 살 때가 있다. 일일이 해명하자니 한이 없고, 참고 넘기자니 속이 터질 노릇이지만, 이래도 저래도 결국 본인만 손해다.

옛날이라고 다를 것이 없었다. 오죽하면 공자도 “임금을 섬길 때 신하의 예를 다하는 것을 가지고 사람들은 아첨한다고 한다”며 답답해했을까.

조선 중기 학자이자 문신인 고봉 기대승은 집안에 일이 많아 과거에 응시하지 않은 것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자, ‘삼해(三解)’라는 글을 지어 해명했다. 세 가지 해명, 즉 행적에 대해 해명한 적해(跡解), 생각에 대해 해명한 의해(意解), 사리에 비추어 해명한 이해(理解)로 구성돼 있다. 의해의 요지는 대개 선행과 악행은 스스로 통제해 볼 수 있지만 비방과 칭찬은 남에게 달린 것이라 어찌할 수 없으니 스스로 떳떳할 수 있도록 노력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일종의 수기론으로, 비방에 대한 옛사람들의 전형적인 대처법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해소된다는 식으로 느긋한 대처법도 있었다. 중국 한나라 때의 문신인 직불의와 제오륜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직불의는 조정의 동료들로부터 형수와 간통했다는 모함을 받았고, 제오륜은 장인을 상습적으로 구타한다는 모함을 받았다.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은 탓에 소문이 수그러들지 않다가 나중에 각각 “내게는 형수가 없다” “내가 결혼했을 때는 장인이 돌아가신 뒤였다”고 하자 비로소 오해가 해소됐다.

각박하게 따지지 않는 도량에 대한 미담으로 자주 인용하는 고사지만, 이들이 초기에 해명하지 않고 비난을 묵묵히 감수한 것은 잘못이라는 지적이 많았다.

문제는 우리가 늘 모함을 당하는 사람의 대처 방식에만 주목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스스로 남을 모함하지 않도록 고민하는 것이 정상일 텐데 말이다.

모함이 일어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시기심이나 사욕 때문이고 하나는 의심 때문이다. 시기심은 소인배의 도량을 벗어나지 못하니 어쩔 수 없겠지만 의심은 조금 더 객관적으로 되고자 하는 노력만 기울인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한 번 품은 의심을 풀기란 쉽지않다. 비방에 대한 대처보다, 남을 의심하지 않는 게 더 어려운 문제일 수도 있다. 꼭 남을 해치고서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아니라면, ‘내가 그 경우라면 어떻겠는가’라는 생각을 수시로 떠올려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바로 ‘대학’에서 말한 혈구지도(矩之道)다.

권경열 <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사업본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