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성 기자의 와인 칼럼 '우리의 와인' < 7회 >

"천·지·인..사람은 모두 하늘과 땅 사이에서 성장하는 거야."
사진= 도멘 '루 뒤몽'의 화이트 와인 '루 뒤몽 뫼르소'. 사진=김민성 기자

사진= 도멘 '루 뒤몽'의 화이트 와인 '루 뒤몽 뫼르소'. 사진=김민성 기자

[ 김민성 기자 ] 큰 인기를 누렸던 와인 만화 '신의 물방울' 9권에는 '순수함'에 관한 에피소드가 등장합니다.

프랑스 청년, 장의 아버지는 일본에서 고급 프랑스 레스토랑을 운영합니다. 장은 일본 여성 치카와 결혼하고 싶어하지만 장의 아버지는 결사 반대입니다. 프랑스인이라면 프랑스인과 결혼해야 순수함을 지킬 수 있다고 믿거든요.

프랑스인이지만 프랑스 양대 와인 생산지인 보르도 와인은 입에 대지도 않습니다. 카베르네 쇼비뇽과 메를로, 카베르네 프랑, 프티 베르도 등을 블렌딩하는 보르도 와인은 아상블라주(assemblage·블렌딩)라 순수하지 않다고 깔봅니다.

대신 부르고뉴의 피노 노아 100% 와인 등 단일 품종 와인만 마십니다.

보르도는 포도 작황이 나쁘면 블렌딩으로 맛과 향의 한계를 극복합니다. 그래서 해마다 세파주(cepage·블렌딩 품종)가 달라집니다. 반면 부르고뉴의 100% 피노 누아 와인은 단일 품종을 쓰기 때문에 숨을 곳이 없습니다. 포도 농사를 망치면 그해에는 포도주를 담글 수가 없습니다. 부르고뉴 양조자들이 포도밭 관리에 무엇보다 신경을 쓰는 이유입니다.

단일 품종으로 일궈낸 명성과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는 장인 정신, 그리고 때묻지 않은 고귀함. 장의 아버지가 일본인 며느리를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부르고뉴 와인과 닮았습니다. 참다 못한 장은 아버지와 인연을 끊고 치바와 결혼하려 합니다. 순수함에 대한 집착이 지나쳐 타인종을 배척한 이들이 오히려 프랑스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이쯤되면 어김없이 해결사가 등장합니다. 이 만화 주인공이자 천재적 와인 감별 능력을 가진 시즈쿠입니다. 여지없이 이들의 얽히고 꼬인 마음을 한방에 풀어줄 묘약같은 와인 한병을 선보이죠.

라벨에 천(天)·지(地)·인(人), 세 한자가 선명히 적인 도멘 '루 뒤몽(Lou Dumont)'의 뫼르소(meursault) 2003.
사진= '신의 물방울' 9권에 등장하는 '루 뒤몽 뫼르소 2003' 와인. 사진=김민성 기자

사진= '신의 물방울' 9권에 등장하는 '루 뒤몽 뫼르소 2003' 와인. 사진=김민성 기자

산(山·dumont). 부르고뉴 뫼르소 밭에서 키운 샤르도네로만 만든 화이트 와인. 아상블라주 없는 100% 블랑 드 블랑(Blanc de Blanc). 순수한 부르고뉴 와인 전통을 담고 있습니다.

너무 만화같지만, 이 와인으로 장의 아버지는 닫힌 마음의 문을 엽니다. 대체 이 화이트와인 한병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었을까요?

실제 '루 뒤몽'은 한국인 부인 박재화(47)씨와 남편 나카다 코지(41)씨가 세운 와이너리입니다. 프랑스인조차 높은 진입장벽을 절감한다는 부르고뉴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직접 와인을 양조하고 유통하는 네고시앙(Negociant)으로 뿌리를 내린 동양인들이죠. 장의 아버지는 프랑스인이 아닌 동양인도 부르고뉴 와인의 순수함을 계승할 수 있음을 한병의 와인을 통해 배운 셈입니다.

최근 '루 뒤몽' 와인을 다시 만났습니다. '정식당'에 일하는 최은식(34) 소믈리에를 통해서입니다.
사진= 최은식 소믈리에가 '루 뒤몽 뫼르소'와 함께 '정식당' 와인셀러 앞에 섰다. 사진= 김민성 기자

사진= 최은식 소믈리에가 '루 뒤몽 뫼르소'와 함께 '정식당' 와인셀러 앞에 섰다. 사진= 김민성 기자

최 소믈리에는 지난 7월 소펙사(SOPEXA)가 주최한 제12회 한국소믈리에대회에서 1등을 차지한 '국가 대표'급 소믈리에입니다. 소펙사는 프랑스 농식품수산부로 우리나라로 따지면 농림축산식품부 같은 곳인데요.

한국소믈리에대회는 국내 내로라하는 특급 소믈리에들이 실력을 겨루는 전통있는 대회입니다. 까다로운 필기시험을 통해 방대한 이론 배경을 검증한 뒤 수준 높은 블라인드 테이스팅 능력을 따집니다. 게다가 와인을 서비스하는 마인드, 음식과의 매칭 능력, 외국어 대화 실력 등 특급 소믈리에가 지녀야할 인성과 자질, 기술, 순발력까지 모든 요소를 고루 요구합니다.

최 소믈리에를 만나기 전에 '인생의 와인' 한병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인생의 와인. 참 어려운 요구를 했구나 싶었습니다. 수천병 와인을 마셔보고 각각의 장점을 꿰고 있는 최정상급 소믈리에에게 무식한 부탁을 한 건 아닐까도 했고요.

"고민이 많았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최 소믈리에가 내놓은 와인이 바로 '루 뒤몽 메르소'였습니다.

물었습니다. "왜 이 와인이죠?"

답하더군요. "가장 힘들었던 시절 저를 보듬어준 분들이 만드는 와인입니다."

있는 듯 없는 듯 평범했고, 그닥 꿈도 없던 유년시절을 보낸 최 소믈리에는 대학에서 호텔경영을 전공했습니다. 군대를 제대한 뒤 국내 한 호텔에 입사하면서 와인을 가까이 접하기 시작했죠.

사진= '정식당' 최은식 소믈리에. 사진=김민성 기자

사진= '정식당' 최은식 소믈리에. 사진=김민성 기자

책에 의존해 공부했던 탓인지 실제 업장에서 만나는 수준 높은 와인 애호가들의 눈높이를 만족시키기 어려웠습니다. 더 깊은 와인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국내에서는 힘들겠다고 생각한 그는 2007년 부르고뉴 와인 유학을 감행합니다. 국내에는 국가공인 소믈리에 자격증이 없습니다. 반면 프랑스는 전문 소믈리에를 국가에서 양성합니다. 대표적인 곳이 부르고뉴 본에 있는 와인전문교육학교, 카파(CFPPA)입니다.

2년동안 미친듯이 와인을 공부했다고 합니다. 최대한 좋은 와인을 마셔보기 위해 밥값을 아끼고 아껴 와인을 샀습니다.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도 벌어야 했기에 제대로된 끼니를 못 챙겨 먹는 날이 부지기수였습니다.

타향, 부르고뉴에서 외롭게 유학하던 한 청년을 보듬어 준 이들이 바로 '루 뒤몽'의 박재화·코지 부부였습니다. 이들 부부도 카파에서 공부했습니다. 혈혈단신 공부한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최 소믈리에게 틈틈이 밥을 내주고, 와인을 양조하는 방법과 좋은 소믈리에가 걸어야할 '길'을 알려줬습니다.

유난히 한국식 입맛이라 김치 없이는 밥을 잘 못먹는 최 소믈리에게 가장 큰 선물은 박재화씨가 직접 담근 김치와 차려준 따끈한 쌀밥이었다고 합니다. 유색인종, 동양인이지만 부르고뉴 와인을 만드는 진정성과 자부심, 책임감에 대해서도 많은 조언을 해주신 분들이었습니다.

"참 따뜻하고 배려가 많은 부부셨어요. 이런 사람들이 만드는 와인이 어떻게 따뜻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와인 뿐만 아니라 인생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제가 이 와인을 마실때 그 분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다른 이들도 이 와인으로 그 마음을 느낄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요."
사진= 최은식 소믈리에는 항상 정장 왼쪽 가슴 위에 카파 졸업 소믈리에의 상징인  포도 배지를 달고 일한다. 사진=김민성 기자

사진= 최은식 소믈리에는 항상 정장 왼쪽 가슴 위에 카파 졸업 소믈리에의 상징인 포도 배지를 달고 일한다. 사진=김민성 기자

2010년 카파 소믈리에를 상징하는 포도 배지를 가슴에 달고 귀국한 최 소믈리에는 그해 한국소믈리에 대회 3위에 오르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2011년과 2012년, 연이어 2등을 차지하더니 마침내 올해 1위 자리에 올랐습니다. 브루고뉴에서 독학하던 청년이 4년간 끊임없는 도전 끝에 한국을 대표하는 소믈리에가 된 셈입니다.

"1등 소식을 전하자 그 분들이 자랑스럽다고 하셨어요. 부르고뉴에 오면 다시 밥 한번 꼭 먹자고. 이제는 저도 그 분들에게 작으나마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박재화씨는 '어느 날 부르고뉴 와인 한잔이"라는 책을 펴낸 적이 있습니다. 책을 보면 '와인의 와자(字)'도 모르던 박씨가 1996년 프랑스로 떠나게 된 계기가 나옵니다. 뇌졸중으로 먼저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자식을 키우시던 어머니마저 암으로 세상을 뜬 직후였습니다. 당초 미술품 복원 공부를 하러 갔지만 그녀의 인생을 바꾼 건 책 제목처럼 어느날 부르고뉴에서 마신 와인 한잔이었습니다.

떡장사로 학비를 보태주던 친언니 부담을 덜어주려 선택한 대학이 싼 기숙사가 딸린 디종의 부르고뉴대학이었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술을 즐겼던 탓에 술이라면 징글징글했던 그녀였습니다.

그러나 부르고뉴 와인을 통해 술의 매력에 눈을 떴습니다. 운명처럼 와인 공부를 하던 일본인 남편을 만났습니다. 결국 그녀의 인생도 와인으로 인해 180도 변했습니다. 알 수 없는게 그래서 인생이라죠.
사진= 최은식 소믈리에의 손. 최정상 소믈리에답게 인터뷰 내내 단정한 몸가짐 자세를 지 않았다. 사진=김민성 기자

사진= 최은식 소믈리에의 손. 최정상 소믈리에답게 인터뷰 내내 단정한 몸가짐 자세를 지 않았다. 사진=김민성 기자

"박씨 부부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요?"라고 물었더니 최 소믈리에는 이렇게 답하더군요.

"와인에 대해 많이 공부했을지 모르지만 와인을 만드는 사람이나 제 인생에 대한 공부는 그만큼 못했을 겁니다."

'신의 물방울' 속 '루 뒤몽 뫼르소'가 현실감 떨어지는 만화 소재일 뿐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박재화씨가 선택하고 개척한 인생은 전혀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살아온 최 소믈리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으니까요.

와인을 그저 취하기 위한 술로만 여길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박씨 부부는 '루 뒤몽'에서 와인만 만든게 아닙니다. 한국을 대표할 소믈리에도 가꾼 셈이죠.

'루 뒤몽' 라벨에는 사람을 뜻하는 '인'이 가장 크게 적혀있습니다. 하늘을 뜻하는 '천'과 땅을 의미하는 '지', 그 중간에 위치하죠. '신의 물방울' 작가는 그래서 '루 뒤몽 뫼르소' 에피소드의 마지막 만화 컷을 이런 글로 끝맺었나 봅니다.

"나라와 인종은 달라도, 사람은 모두가 새로운 하늘과 땅 사이에서 성장해 가는 거야."

와인은 사람이 만들지만 때로는 와인이 사람을 더욱 '사람'으로 만듭니다.

최 소믈리에가 한국을 넘어 세계적인 소믈리에로 성장하길 바라봅니다.
사진= '신의 물방울' 9권 '루 뒤몽 뫼르소' 에피소드 마지막 만화 컷. 사진=김민성 기자

사진= '신의 물방울' 9권 '루 뒤몽 뫼르소' 에피소드 마지막 만화 컷. 사진=김민성 기자

p.s.1) 최은식 소믈리에가 일하는 '정식당'은 최근 한식당 처음으로 뉴욕 미슐랭 2스타를 받은 '정식(JUNGSIK)'의 한국 본점입니다. 임정식 셰프가 이끄는 곳이죠. 2010년 '정식당' 소믈리에 근무 제안을 받았을 때 최 소믈리에는 처음에 한국적인 상호 탓에 고깃집인줄 알았다고 합니다. 임 셰프와는 일면식도 없었고요. 3년이 지난 현재 정식당은 국내 최고 셰프와 소믈리에를 함께 보유한 파인다이닝(Fine Dining)으로 성장한 셈입니다. 두 분의 시너지 효과, 앞으로도 기대하겠습니다.

p.s. 2)앞으로 국내 대표 소믈리에들의 인생과 와인 이야기를 종종 들려드리겠습니다. 그들이 꼽는 '인생의 와인'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p.s. 3) '우리의 와인'에서 전해드리는 오늘의 노래는 루시드 폴의 '사람이었네' 입니다.

글·사진=한경닷컴 김민성 기자 mean@hankyung.com 트위터 @mean_R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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