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성 기자의 와인 칼럼 '우리의 와인' < 6회 >

먼저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습니다.
사진=영화 '살인의 추억' 스틸 컷. 출처=네이버 영화

사진=영화 '살인의 추억' 스틸 컷. 출처=네이버 영화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소재로 했던 2003년 영화 '살인의 추억(감독 봉준호)'

비에 흠뻑 젖은 시골 형사, 배우 송강호는 서글픈 눈으로 살인용의자에게 물었습니다.

"밥은 먹고 다니냐?"

다 잡았다고 확신한 용의자(배우 박해일)가 DNA 감식결과 진범이 아니라는 청천벽력 같은 통보 앞에, 고됐던 수사가 물거품이 된 순간에 형사는 범인의 끼니를 거론했습니다. '살인을 하고서도 밥이 목에 넘어가더냐' 같은 비아냥이었다는 감상평도 있었죠.

한국인이 뭔가 미안하거나 상대에 측은지심이 들 때 은연 중 툭 던지는 말이 저런 '밥'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밥은 쌀, 그 이상으로 힘이 셉니다.

형사의 말에는 그래서 밥의 한국적 의미가 고스란히 배어 있습니다. 배고픈 시절의 한(恨)이자 억세고 고된 하루 온통에 대한 보상이었으니까요.

"식사하셨어요?"가 인사말이 될만큼 밥을 먹고 못 먹고는 실존적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가족을 식구라고 하죠. 밥을 함께 먹는 사람. 가족의 시작은 피를 나눈 혈연이지만 식구의 연속성은 밥상 위에 있습니다.

이탈리아 와인을 마실 때 저는 유독 '밥'에 대해 생각합니다. 와인의 본연적 역할은 밥과 함께 마시는 술, 반주(飯酒)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삼겹살에 소주를, 파전에 막걸리를, 치킨에 맥주를 곁들이듯 말이죠. 와인 소믈리에 핵심 역량이 와인과 음식 간 최상의 궁합(마리아주)을 찾아내는데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와인을 독립적인 술로 많이 즐깁니다. 와인만의 맛과 향을 참 중시합니다. '신선한 굴이 있으니 쇼비뇽 블랑 화이트 와인 한잔 할까'보다 '분위기 있게 와인 한잔 하는데 안주로 치즈 먹을까'하는 선(先) 와인, 후(後) 음식의 경우죠.

반면 서양에서 와인은 우리네 밥상 물이나 국 같은 존재입니다. 음식이 있으니 어울리는 와인을 마시는 겁니다. 특히 이탈리아가 그런 나라입니다.

이탈리아 와인은 지구상 가장 오랜 3000년 역사를 자랑합니다. 그만큼 매력적인 반면에 생산지나 품종이 복잡해서 와인 애호가들도 어려워하는 국가죠.

이탈리아 거의 전역에서 와인이 만들어집니다. 연간 와인 생산량은 8억병. 와인 생산량 및 소비량· 수출량은 프랑스에 이어 세계 2위, 포도재배 면적은 스페인과 프랑스에 이어 3위입니다.
사진=이탈리아 전역 와인 생산지와 대표 와인명을 기재한 이탈리아 와인 지도. 출처=www.svimports.com

사진=이탈리아 전역 와인 생산지와 대표 와인명을 기재한 이탈리아 와인 지도. 출처=www.svimports.com

장화마냥 길게 뻗은 이탈리아는 남북이 위도상 10도나 차이 납니다. 북쪽 피에몬테부터 이탈리아 와인의 중심지 피렌체, 베네토, 롬바르디아, 캄파니아, 아브루죠, 마르게, 남쪽 섬 시칠리아까지 기후 및 지형이 제각각이라 와인의 다양성이 도드라질 수 밖에 없죠.

양조용 포도도 300종류 이상입니다. 레드와인 용인 산지오베제·네비올로·바르베라·브루넬로·코르비나, 화이트는 트레비아노·말바시아·코르테세·그라지오·모스카토 등 토착 품종 다양성도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사진=  포도를 자연적으로 말려 당도를 높이는 아파시멘토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아마로네 와인에 쓰이는 마른 포도 모습.

사진= 포도를 자연적으로 말려 당도를 높이는 아파시멘토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아마로네 와인에 쓰이는 마른 포도 모습.

이탈리아 와인이 난해하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구대륙 와인 중 대중적 접근성이 가장 떨어진다고도 하죠. 소비자가 이탈리아 와인을 보면 '이 품종은 뭐지? 무슨 맛일까?' 같은 의구심이 먼저 들기 때문에 잘 사지 않는다는 겁니다. 합리적 구매를 돕는다는 원산지 명칭 규정도 이탈리아는 여러번 개정됐기 때문에 꽤 복잡합니다.(다음에 기회되면 설명해 드릴게요.)

사진= 한국을 방문한 '감베로 로쏘' 마르코 편집장(왼쪽)과 함께 기념 사진을 찍은 기자. 사진=김민성 기자

사진= 한국을 방문한 '감베로 로쏘' 마르코 편집장(왼쪽)과 함께 기념 사진을 찍은 기자. 사진=김민성 기자

최근 국내에서 이탈리아 유명 와인양조자와 와인 저널리스트 등을 만나 이런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취재차 만난 이탈리아의 저명한 와인 잡지 '감베로 로쏘(Gambero rosso)' 마르코 사벨리코(51) 편집장도 이탈리아 와인의 난해함에 공감하면서도 이렇게 설명하더군요.

"카베르네 쇼비뇽과 메를로, 시라 등 국제적으로 유명한 포도로 만든 신대륙 와인들과 이탈리아 와인을 비교하기는 힘듭니다. 신대륙 와인은 폭발적인 과일향과 오크통 숙성을 통한 진한 부케로 대부분 천편일률적인 대중성을 드러내죠. 하지만 이탈리아 와인은 순수한 테루아를 중시합니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들어 음식과 함께 마실 때 그 매력이 가장 빛을 발합니다. 그래서 절대 음식과 따로놓고 말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붉은 새우'를 뜻하는 감베로 로쏘는 1986년 창간된 잡지입니다. 마르코 편집장은 전세계에 복잡한 이탈리아 와인을 가장 체계적이고 객관적으로 소개해온 와인 저널리스트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오히려 품종이 복잡하고 지역이 세분화된 이탈리아 와인이 더 매력적이라고 말했습니다. 뿌리깊은 다양성이 장점이라는 것이죠.

그래서일까요. 대를 이어 와인을 만드는 이탈리아 양조자들은 가족과 식사 때 함께 나누는 와인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마르코 편집장과 함께 방한한 베네토 지역의 대표적 아마로네 생산자 '알레그리니(Allegrini)'의 마릴리사 알레그리니 여사도 이렇게 말하더군요.
사진= 알레그리니 와이너리 소유주인 마릴리사 알레그리니 여사(왼쪼)과 알레그리니 와인들. 사진=김민성 기자

사진= 알레그리니 와이너리 소유주인 마릴리사 알레그리니 여사(왼쪼)과 알레그리니 와인들. 사진=김민성 기자

"이탈리아 와인을 설명할 때 가족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알레그리니 역시 제 아버지의 열정과 혁신으로 전통을 이어왔습니다. 지금도 오빠와 함께 와인을 만들죠. 우리가 만든 와인을 가족과 나눌 때 기쁨을 느낍니다. 집에 온 손님에게는 우리 와인을 최대한 잘 대접해 보내야한다고 늘 아버지는 말씀하셨죠."

지난달에는 키안티 클라시코를 대표하는 와이너리, 포제리노(Poggerino) 소유주 피에로 란자씨와 람부르스코 대표 로제와인인 콘체르토(Concerto)를 만드는 메디치 에르메테(Medici Ermete)의 오너 알베르토 메디치씨도 한국에 왔습니다.

특히 백발이 희끗한 에르메테씨는 스무살 난 아들과 함께 한국에 왔는데요. 다음과 같은 그의 말에서 이탈리아 와인 정체성을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진= 메디치 에르메테의 콘체르토 와인(왼쪽)과 생산자인 알베르토 메디치씨. 사진=김민성 기자

사진= 메디치 에르메테의 콘체르토 와인(왼쪽)과 생산자인 알베르토 메디치씨. 사진=김민성 기자

"이탈리아에서 와인은 생활필수품이에요. 주변 어디에나 있고 식사자리에는 빠지지 않습니다. 아들에게 열살이 넘었을 때부터 와인을 줬어요. 술이라기보다 우리 가족이 만든 음료예요. 가족이 만든 음식을 더 맛있게 먹을 수 있게 해주는 존재. 또 가족들이 식사자리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화기애애하게 나눌 수 있도록 도와주죠."

사진= 포제리노의 '키안티 클라시코 2010' 와인.

사진= 포제리노의 '키안티 클라시코 2010' 와인.

괜찮은 이탈리아 와인을 마셔보면 집밥같은 매력을 여러분들도 느낄 수 있습니다. 농약은 일절 쓰지 않는 비오디나미 방식으로 만든 포제리노의 기본급 와인 '포제리노 키안티 클라시코 2010'(4만8000원)이 특히 그랬는데요.

일단 마른 짚풀마냥 꿈꿈한 메주냄새가 올러오더니 이내 화사한 제비꽃 향기와 어우러집니다. 과일맛이나 당도, 밀도, 탄닌 등 흔히 한국인이 좋아하는 진한 레드와인의 응집감은 없습니다. 그래서 혀에 닿는 촉감은 부드럽고 신선합니다. 매끄러운 구조감은 수수하고 소박하지만 산도는 높아 끝맛이 깔끔합니다. 몸 속에 '화'한 무언가가 퍼지면서 포근하고 따뜻한 느낍입니다.

인공 조미료 쓰지 않고 시골장으로 끓인 고향집 된장찌개 같습니다. 이런 찌개는 흰쌀밥에 김치에 쉴새없이 손이 가게 만들죠. 포제리노 와인과 함께 맛 본 이탈리아 전통의 볼로네제 파스타 한 입. 참 맛있었습니다.

음식의 맛을 해치지 않기 위해 자신을 비우는 와인. 그 와인을 만나 비로소 최고의 맛을 내는 음식.
먼저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다고 했습니다. 던지면 받아주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모자란 곳을 서로 채우고 충돌이 일어나면 한발씩 물러나야 궁합 좋은 가족, 연인이라고 하죠.

서로 다른 존재들이 만나 한차원 더 높은 단계에서 조화를 이룬다는 '원융회통(圓融會通)'이 이런 경우가 아닐까요. 와인과 음식의 궁합을 뜻하는 마리아주(mariage)의 어원은 그래서 영어로 '매리지(marriage)', 즉 결혼입니다. 가족의 출발점이기도 하죠.(^^)

p.s. 1) 이탈리아에는 카베르네 쇼비뇽·메를로 등 국제적 품종을 활용, 세계적 명성을 얻은 '수퍼 투스칸(Super Tuscan)' 와인도 많습니다. 토스카나 볼게리 지역 테누타 산 귀도의 사시카이아(Sassicaia·카베르네 쇼비뇽 100%)를 효시로 마세토(Masseto·메를로 100%), 솔라이아(Solaia·카베르네 쇼비뇽 75%, 산지오베제 20%, 카베르네 프랑 5%), 오르넬라이아(Ornellaia·카베르네 쇼비뇽 65%, 메를로 30%, 카베르네 프랑 5%) 등이 그렇습니다. 키안티 지역 대표적 고급 와인인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BDM)도 유명합니다.

p.s. 2) 감기가 심해 요즘 와인 맛을 제대로 못보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들도 감기 조심하세요.

p.s. 3) '우리의 와인'에서 전해드리는 오늘의 노래는 가수 이승환의 '가족'입니다. 가족들과 함께 따뜻한 집밥 드셔보세요.(^^)



글·사진=한경닷컴 김민성 기자 mean@hankyung.com 트위터 @mean_R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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