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측근 경영·배신(背信)의 '덫'
동양그룹 전략기획본부 임원을 지낸 A씨는 몇 년 전 그룹 내에 ‘실세’들이 따로 있다는 말을 듣고 조사해봤다고 했다. 몇 사람 이름이 드러났다. “황제처럼 군림한다”는 얘기도 들렸다. 그들의 이력서를 찾아봤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본부장에게 보고해 받아보려고 했다. 뭘 하려는 ‘작자’들인지….

윗선에서 연락이 왔다. “이력서 받지 마세요.” 그리곤 한직으로 발령이 났다. 55년 전통의 동양그룹, 국가 기간산업(基幹産業)으로 손꼽혀온 시멘트 기업에서 잔뼈가 굵은 A씨는 “나 자신이 너무 무력했고 비겁했다”며 나누던 소주잔에 눈물을 떨궜다.

지나친 개인 커뮤니티 신뢰

오너 일가의 해외 체류 또는 유학 때 한동네에 살았거나 동문회, 포럼, 교회 등 개인적인 커뮤니티가 인연이 돼 신뢰를 받게 된 베일에 싸인 ‘실력자’들이 힘을 쓰는 기업들이 적지 않다. 5만여명의 투자자에게 1조5000억원 이상의 피해를 입힌 ‘동양 부실사태’도 기존 경영진과 ‘신(新)실세’ 간의 알력 속에서 구조조정 타이밍을 놓친 탓이었다는 게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이른바 ‘비선(秘線)라인’은 최종 결정권자가 절차적 지체에서 벗어나 빠른 결론을 내리고 싶을 때 가동하는 경우가 많다. 몰래 관계를 맺고 움직이다 보니 비선라인과 기존 경영진은 필연적으로 충돌한다. 결정권자가 비선을 과도하게 믿는 경향은 두 진영 간의 갈등을 더욱 증폭시킨다.

재계 인사들은 버팀목이 돼 온 총수의 유고(有故)상황이 이어지면서 비선이 부상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고 평한다. 2, 3세 승계와 맞물리면서 일이 더 꼬인다. 비선은 ‘측근 경영인’으로 전면에 나서고 핵심 계열사를 접수한다.

관찰평을 종합해보면 ‘비선라인’에서 움직이는 ‘실세’들은 자신의 몫을 개인 회사를 차려 따로 챙기는 게 보통이다. ‘측근 일감 몰아주기’가 횡행한다. 컨설팅 소모성자재구매대행(MRO) 인테리어 건축 광고대행 등이다. 시스템통합(SI) 부문을 장악하려는 특성도 있다. 생산·판매는 물론 돈의 흐름, 임직원의 일거수일투족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전산망을 확보한다. 그룹 임직원들 사이에서는 사무실 PC를 이용해 메신저, 이메일을 보낼 때 ‘누군가 들여다보는 게 아니냐’는 공포심이 퍼진다. 말 그대로 기업의 ‘빅브러더’가 되는 거다.

총수 유고 속 '비선' 득세

‘클린경영’과 혁신, 세대교체는 단골 메뉴다. 그룹에 몸 바쳐 온 30~40년 터줏대감들의 법인카드 내역을 조사해 빌미를 잡아 쳐낸다. 오너들은 ‘비선라인 실세’들의 젊은 추진력과 박진감에 푹 빠져 큰 기대를 건다. 유려한 프레젠테이션, 세련된 예절, 현란한 영어 솜씨…. ‘안되면 되게 한다’는 돌관력과 ‘근면 새벽정신’이 몸에 밴 창업세대는 초라해진다.

허리를 90도로 꺾고 윗사람이 앉을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는 사람, 전용 엘리베이터를 따로 쓰는 외곽 사무실을 차려 놓고 몇 년 새 새로 들어온 ‘듣보잡’ 젊은이들을 지배하는 자. ‘배신의 칼’을 가는 요주의 대상이다.

소통의 길을 틀어 쥔 ‘문고리 권력’이 역동성, 도전을 가장 중시하는 기업 경영에서도 논란이 되는 게 안타깝다. 포위된 오너들은 승계에서, 구조조정 과정에서 조직 이익, 지속성보다 진한 피에 이끌리는 듯하다. 믿었던 측근의 배신에서 사람의 욕망과 돈, 권세를 향한 집착을 똑똑히 보는 일을 언제까지 되풀이할 텐가.

유근석 증권부장 yg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