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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1에서 이어짐) 1993년 졸업 후 방준석은 한국으로 들어갔고 이승열은 데모 테이프를 들고 5~6개 기획사문을 두드렸다. 유일하게 송홍섭이 운영했던 송스튜디오에서 관심을 보였다. 계약을 맺은 이후 윤수일도 관심을 보였다. 이승열과 방준석은 맨땅에 헤딩으로도 모자랄 우여곡절을 겪으며 1집을 발표했다. 1집 〈Nothing’s GoodEnough〉은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서 41위에 등극했을 정도로 2인조 밴드 유앤미블루(U&Me Blue)는 ‘한국 최초의 모던 록 밴드’, ‘한국의 U2’로 불리는 ‘전설’이 되었지만 활동 당시는 한마디로 비운의 밴드였다. 이들이 활동을 시작한 1994년 한국대중음악계는 랩과 레게리듬이 가미된 댄스 음악이 대세였고 아이돌 인큐베이팅 시스템이 도입한 거대 기획사가 막 태동하려 했던 시기였다. 새롭지만 생소했던 이들의 음악은 평단의 호평과는 달리 대중의 외면을 받았다.

“당시 가사가 힘이 없고 유치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방준석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저는 중2때 외국으로 이민을 간지라 한글로 가사를 쓰기가 어려워 난감했습니다. 또한 발음이 부정확하고 어색하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1996년, 2집을 발표했다. 남성적인 강렬함이 담긴 이승열의 ‘그대 영혼에’는 박광수 감독의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OST로 사용되고 2집 〈Cry…Our Wanna be Nation〉은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23위로 선정될 정도로 음악성을 인정받았지만 대중의 반응은 여전히 냉담했다. 그런 상황에서 홍대 클럽 블루데블에서 뜨거운 반응을 처음 접한 이들은 인생의 쓴 맛 단 맛 본 사람이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처럼 행복감을 느꼈다. 1996년 12월 28일 라이브 공연은 거짓말처럼 관객이 꽉 들어찼다. 소수의 광신도가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 “그때 감기에 걸려 골골한 상황이었지만 최선을 다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데 희열을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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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예술의 전당 공연을 마지막으로 1998년 라이브 앨범을 발표한 밴드는 해체되었고 이승열은 좌절감을 안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2000년대 이후 과거의 명반들이 재발매되는 트렌드를 타고 이들의 음반은 고가에 거래되며 대중적으로 회자되기 시작했다. 유앤미블루 음반이 고가에 거래된다는 소식을 언제 들었는지 궁금했다. “미국에서 들었어요. 음반 한 장이 10만원에 거래된다는 소리에 무슨 일인가 싶었죠. 활동하고 있을 때는 왜 그런 반응이 없었을까 아쉬움이 들더군요. 다시 음악을 하고 싶었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 후 유앤미블루 활동 때 뮤지션과 엔지니어로 만나 마음을 열고 지냈던 김병찬대표를 뉴욕에서 다시 만났다. “이 분도 기존의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바꾸고 싶어 한다는 사실에 공감했어요. 그래서 밴드 시절 만들었던 노래 2,3곡을 실마리로 삼아 솔로 작업을 시작했는데 밴드 시절처럼 현실이 힘겨워 멘탈 붕괴가 오더군요.” 그래서 생활을 하기 위해 그는 잠깐 매장에서 돈 수거하는 일과 개인 비서 일을 했다.

뉴욕에서 가수의 꿈을 키우던 후배와 1년 정도 홈 레코딩 작업을 했지만 이건 아니라는 회의감이 들 때 송홍섭이 솔로 데뷔를 제안해왔다. 생소한 레이블이었지만 구체적인 회사이름까지 거론해 기대감을 가지고 2000년 여름에 귀국했다. 홍대 인근의 송홍섭 작업실에서 작업을 했던 그는 10월에 미국에 들어가 결혼을 했다. 2001년 1월 혼자 한국으로 나와 홍대 인근의 고시원에서 생활한 그는 뒤이어 아내가 귀국했지만 주말부부로 지냈다. 2001년 여름. 어떤 곡을 써도 아니라고 퇴짜를 놓은 송홍섭에게 결국 반기를 들었다. “전곡을 쓸 필요가 있냐해 조규찬 곡을 받아봤는데 생각했던 이미지가 아니었어요. 그래서 직접 문제를 풀어볼 생각으로 음반사 관계자를 만났는데 할 말이 없더군요. 인생 경험 제대로 했습니다. 당시 고심이 많았던 송 대장님은 눈 뜨고 계신 순간에는 줄 담배를 피워 건강이 나빠지셨어요. 저를 위해 최선을 다해주셨기에 지금도 평생의 은인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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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스런 상황에 짐을 싸 미국으로 도망간 그는 2001년 늦가을 플럭서스 김병찬대표와 전속 계약을 맺었다. 2003년 고난의 세월만큼이나 숙성된 보컬에 진심을 담아 솔로 데뷔 앨범을 발표했다. 1집은 2004년 제1회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올해의 앨범과 올해의 남자 가수 2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다. 4년 후 발표한 2집은 대중과 소통하지 못하고 겉돌았던 그를 비로소 한국 대중음악계에 뿌리를 내리게 했다. 보컬과 기타 사운드의 절묘한 앙상블로 시대를 대표할 서정성을 담아낸 이 음반은 2008년 제 5회 한국대중음악상에서 무려 4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어 ‘올해의 음악인’에 이어 최우수 모던록 노래’로 ‘아도나이’가 선정되며 팬 층을 확장할 가능성을 처음으로 획득했다.

3집 발표까지 미완성된 곡들을 수많은 라이브 무대를 통해 편곡을 가다듬고 가사를 입혀가는 절차탁마의 4년을 보냈다. 삶의 고뇌와 성찰을 담아낸 3집은 탁월한 가창력이 빛을 발하며 2012년 제9회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최우수 모던록 음반으로 선정되었고 명곡 ’돌아오지 않아’도 노래부문을 휩쓸었다. 한대수의 피처링으로 화제가 되었던 ‘그들의Blues’와 나비가 날아오르는 모습을 인생에 비유한 ‘돌아오지 않아’는 지친 삶의 탈출구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매력적인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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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발표한 4집 V는 한 우물을 파 온 그에게 비로소 거장의 존재가치를 환기시킨 첫 걸음이다. 자신의 내면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소리의 탐구를 통해 채색한 이 앨범은 의미심장한 음악적 진보를 이뤄낸 파격적 음반이다. 이 앨범에도 블루스 곡 bluey(feat.장필순)가 들어있다. “어릴 때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었는데 잠들 때 많이 들었던 목소리가 장필순선배입니다. 굉장히 남성을 유혹하는 질감을 느꼈죠. 유앤미블루 시절에 진행하시는 라디오 프로에 출연해 처음 얼굴을 봤습니다. 실망은 아닌데 목소리와는 느낌이 다른 중성적인 외모시더군요(웃음). 요즘은 활동을 많이 안 하셔서 혹시 피쳐링에 응해 주시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흔쾌히 수락하셔서 기뻤습니다. 녹음 파일을 주고받으며 작업을 했는데 2절 이후에 그 정도로 내 지르시며 강하게 나오실지는 몰랐습니다.”

인상적인 앨범 재킷에 대해서도 궁금했다. “솔직히 1, 2집 재킷 디자인은 할 말이 없습니다. 그땐 그런 부분까지 관여하는 게 오버라 생각했어요. 이번 4집은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했는데 첫 번째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피와 살코기였습니다. 그래서 마장동에 가 소고기 사진도 찍었는데 원하는 이미지가 아닌지라 미국에 계신 암 투병 중인 종군 사진기자 김현수님에게 ‘피 사진이 필요하다’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일차 분은 응고되어 가는 고체 느낌이 강한 식상한 이미지라 마음에 들지 않아 2차로 리얼하고 아름다운 사진을 받았어요. 원래는 하얀색 바탕인데 코팅을 하면서 색이 더해졌습니다. 로마숫자 5를 의미하는 V는 인장을 파서 찍었는데 앨범을 순서대로 표기하는 게 싫어 4가 아닌 5로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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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승열을 이 칼럼에 소개하려 했을 때 인디뮤지션으로 봐야하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대자본으로 설립된 제작사에 소속된 언더 개념의 뮤지션이라 생각했었기 때문. 그로 인해 인디의 개념에는 제작 시스템만이 아닌 음악 통제권을 잃지 않는 정신도 중요한 키워드임을 인지했다. 2012년 1월 그는 회사와 계약이 만기가 되었을 때 시대에 뒤떨어지는 앨범 계약구조를 바꾸고 싶어 계약금을 받지 않는 새로운 계약조건을 제시했다. “예전에 어떻게 품위를 유지하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기분이 나빴습니다. 저는 EBS 라디오에서 책읽어주는 이승열의 영미문학관과 2012년 10월부터 교통방송에서 매주 한 번씩 100% 한국 인디음악을 소개하는 ‘인디 애프터눈’을 진행하며 생활이 가능한 돈을 벌고 있습니다. 계약금을 받았다는 굴레에서 벗어나면서 내 음악을 스스로 통제하는 제작자가 되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승열은 정규 4집을 통해 한국대중음악사에 기록될 놀라운 울림을 이뤄내며 자신에게 존귀한 존재로서의 가치를 부여했다. 대중음악을 소비적인 오락적 대상이 아닌 예술적 경지로 견인하고 있는 그는 이제 거장의 행보로 기록될 중후한 발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7월 12, 13일 서울 대학로에 있는 홍익대 아트센터 대극장 공연에 가면 감동스런 울림의 실체를 경험할 것이다.

글, 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편집. 권석정 moribe@tenasia.co.kr

사진제공. 플럭서스뮤직

이승열 프로필
1970년 서울 출생 미국 뉴욕주립대 빙헴튼 캠퍼스 졸업
1991년 4인조 유앤미블루(U&Me Blue) 결성, 메릴랜드 동부 한인대학생 가요제 대상
1994년 2인조 유앤미블루(U&Me Blue) 데뷔, 유앤미블루 1집 ‘Nothing’s GoodEnough’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41위
1996년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OST 2집 수록곡 ‘그대 영혼에’, 유앤미블루 2집 ‘Cry…Our Wanna be Nation’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23위
2004년 솔로 1집 제1회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앨범, 올해의 남자 가수 노미네이트
2008년 5회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음악인’, ‘아도나이’ 최우수 모던록 노래 2관왕
2012년 솔로 3집 제9회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모던록 음반, 노래부문 2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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