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르마 "신흥국 위기는 中 고성장·美 QE에 취해 개혁 등한시한 결과"
“신흥국 위기는 중국의 고성장과 선진국의 값싼 돈이라는 마약에 빠져 흥청거린 신흥국들이 자초한 결과다.”

루치르 샤르마 모건스탠리 신흥시장 및 세계거시경제 총괄 대표는 2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신흥국의 위기가 선진국의 양적완화(QE) 축소 때문이라는 얘기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양적완화 축소는 예정된 시나리오였고 신흥국들은 충분히 대비할 시간이 있었다”며 이같이 지적했다.

샤르마 대표는 신흥국 중에서도 옥석을 가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필리핀은 지금 전성기를 맞았고, 멕시코도 성장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다. 폴란드와 체코, 대만도 선진국 경기 회복의 덕을 볼 것으로 전망했다. 한국에 대해선 “지금은 괜찮지만 부채가 너무 많고 성장잠재력도 약해지고 있다”며 “꾸준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그가 모건스탠리에서 신흥국에 투자하고 있는 돈은 약 250억달러다.

▷신흥국 위기의 근본 원인을 뭐라고 보나. 2012년 ‘브레이크아웃네이션’을 쓸 때 이를 예상했나.

“지난해 책에서 나는 중국의 침체와 선진국 중앙은행의 값싼 돈이 곧 신흥국에서 빠져나갈 것으로 예상했다. 당연히 신흥국이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사실 이미 2011년부터 신흥국에서는 자금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미국 중앙은행(Fed)이 지난 5월 양적완화 출구전략을 발표하면서 속도가 더 빨라졌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경상수지 적자가 심하고 정치가 불안정해 많은 부채를 제대로 갚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국가들이 위기에 빠졌다. 지금까지 중국의 고성장과 선진국의 값싼 돈에 의존해 발전하던 나라는 모두 위험하다.”

▷왜 인도와 인도네시아에서 위기가 시작됐다고 보나.

“인도와 인도네시아 둘 다 수입액의 6개월치가량을 감당할 정도의 외환보유액만 갖고 있다. 재정수지, 경상수지 적자도 심하다. 상당 부분은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하는 원유 수입이 너무 많아서다. 이 중 인도가 진짜 재앙의 근원지다.”

▷위기는 말레이시아나 태국 등 아시아 국가는 물론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으로도 전염되는 분위기다.

“국가의 위기를 판단하는 흐름은 성장률 둔화, 외환보유액 감소, 수출 감소, 경상수지 악화, 물가상승률 상승, 지나친 유동성 증가 등이다. 나는 올초 이런 지표들을 기준으로 인도, 남아공, 터키, 칠레, 브라질, 인도네시아 등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태국과 말레이시아는 경상수지가 나쁘지 않다. 대부분의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국가 상황은 1997년보다 낫다. 하지만 위기는 때로 논리적 지표 분석과 상관없이 전염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나라들이 위기를 극복하고 부상할까.

“많은 언론과 경제학자들은 큰 그림을 보지 못하고 있다. 신흥국들은 보통 위기→개혁→고성장→안주→위기의 사이클을 밟는다. 요즘은 많은 국가가 안주 혹은 위기 단계에 있을 뿐이다. 개혁 단계에 있는 국가로는 멕시코를 꼽을 수 있다. 엔리케 페냐 니에토 대통령이 강한 개혁 드라이브를 밟고 있다. 고성장 단계에 있는 나라는 필리핀이다. 필리핀은 지난 10여년간 아시아의 열등생이었지만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한국과 대만같이 경상수지가 건전하고 외환보유액도 충분하면서 수출이 중심인 국가들이 미국과 유럽의 회복세를 타고 성장할 것이다. 동유럽에서도 폴란드와 체코가 물가 문제만 잘 극복해낸다면 선진국 경제 회복의 덕을 볼 것이다. 물론 이들 국가가 안주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역사적으로 선진국들이 긴축을 하면 신흥국이 위기를 겪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선진국 탓이 아니다. 위에 설명한 사이클은 마치 자연법칙 같은 것이다. 지난 10년간 중국의 성장과 선진국의 양적완화는 많은 신흥국 리더들에게 마약과 같았다. 이들은 개혁을 하지 않고 고성장을 자찬하며 흥청거렸다. 신흥국은 충분히 대응할 시간이 있었다.”

▷Fed가 실제로 양적완화를 축소하면 상황이 더 나빠질까.

“Fed가 양적완화를 축소한다는 건 미국 경제 전망이 나아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건 세계 경제에 좋은 신호다. 또 양적완화를 축소한다는 것은 모기지 채권 매입 등을 줄인다는 것이지 통화정책을 축소하거나 금리를 올린다는 얘기는 아니다. 신흥국의 수출 측면에선 괜찮은 소식이다. 하지만 여전히 투자자들이 불안한 국가들에서 돈을 뺄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런 나라들의 통화는 크게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

▷원자재 시장이 조금씩 회복하는 모습이다. 이런 기류가 원자재를 많이 수출하는 브라질이나 인도네시아 같은 나라들의 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그렇지 않다. 원자재는 보통 ‘10년 상승, 20년 하락’의 패턴을 그린다. 기술적으로 지난 10년간 가격이 크게 올랐으니 이제 내려갈 차례다. 러시아, 브라질, 인도네시아, 호주 등은 이전 같은 원자재 수출 호황을 누리기 힘들 것이다.”

▷한국은 어떤가. ‘브레이크아웃네이션’에서는 ‘금메달 국가’로 묘사했는데.

“한국의 상황이 다른 신흥국보다 훨씬 나은 것은 분명하다. 통화가치와 재정 상태가 모두 양호하다. 그렇다고 방심해선 안 된다. 가계 부채가 너무 많은 데다 성장 잠재력이 약화되고 있다. 경쟁력이 낮은 부분을 중심으로 꾸준히 개혁 작업을 해야 한다. 정치와 외교도 중요하다. 우리는 평화로운 한반도 정세, 궁극적으로는 평화통일이 한국의 성장 잠재력을 높여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신흥국들은 위기 탈출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나.

“일단은 긴축이다. 빚을 갚고 외국 물자를 사올 수 있는 돈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통화 하락을 오히려 용인하며 수출을 늘리거나, 이자율을 높여 외국 자본을 끌어들여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산업 간, 지역 간 균형 있는 발전을 꾀해야 한다. 둘 다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그리고 강력한 정치적 리더십을 필요로 한다. 다른 방법은 없다.”

샤르마 누구인가 인도 슈리람대 학사 출신…현장중시로 분석력 뛰어나

세계 최대의 투자은행인 모건스탠리의 신흥시장그룹 투자를 총괄하며, 거시경제 전망까지 맡고 있는 루치르 샤르마 대표는 그 흔한 석사 학위도 없다. 미국이나 영국에서 공부한 적도 없다. 인도에서 태어나 자국 최고의 경영대로 꼽히는 슈리람대에서 학사 학위를 받은 것이 학력의 전부다. 샤르마 대표의 무기는 ‘현장’이다. 1996년 모건스탠리에 입사한 뒤 한 달에 1주일은 꼭 신흥국을 방문했다고 한다. 2012년 낸 책 ‘브레이크아웃네이션’에는 거시분석은 물론이고 각국 골목골목에서 시민과 상인, 정치인들로부터 들은 생생한 얘기가 담겨 있다. 모건스탠리에서도 각 국가의 리스크를 정확히 파악해 투자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것으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100m를 11초대에 주파하는 달리기광이다.

남윤선/노경목 기자 inkling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