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오피스 - 숲과 나무 함께 보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6000 마일 - 조회장이 18일간 미국을 손수 운전해 여행한 거리
일러스트= 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일러스트= 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모자를 눌러 쓴 노신사가 배회하며 이곳저곳을 살피는데 좀 수상합니다.” 인천공항 내 대한항공 발권 카운터에 갓 배치된 신입사원이 본사에 이런 보고를 할 때가 가끔 있다. ‘미스터리 쇼퍼’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64)이다.

조 회장의 경영 행보는 대개 이런 방식으로 이뤄진다. 취항지를 결정할 때도 그렇다. 그룹 총수로 보고만 받는 게 아니라 직접 사전답사 후 취항에 나선다. 허름한 모텔에서 자고 패스트푸드를 먹으면서 18일간 6000마일(9600㎞)을 손수 운전하며 미국 곳곳을 살펴본 일화는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베트남 하롱베이, 터키 이스탄불은 조 회장이 발로 뛰면서 하늘길을 개척한 곳으로 꼽힌다. 40여년간 전 세계를 누비고 있지만 아직도 작은 도시 한 곳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지난 3월 몰디브 취항을 앞두고는 말레 국제공항을 찾아 승객들의 동선 등을 살피며 혹시라도 불편함이 없을지 철저히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출발시간을 밤 시간대로 조정한 이도 조 회장이었다. 신혼여행객들이 결혼식을 마치고 여유롭게 떠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몰디브행 첫 비행기 예약률은 98%를 기록했다.

숲을 보되 나무도 챙겨라

조 회장은 세심할 정도로 경영과 관련한 전 과정을 꿰뚫고 있는 경영자다. 재계에서 조 회장은 ‘디테일에 강한 경영자’로 통한다. 기체에 대해서도 항공 전문용어로 막힘 없이 설명할 정도다. 해외 출장 중 기체 흔들림을 느끼고 조종사의 가벼운 실수를 알아챘다는 일화도 있다.

‘디테일 경영’은 서비스 부문에서 빛을 발했다. 조 회장은 편안하고 넓은 좌석과 인테리어, 기내 엔터테인먼트 시스템 등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2005년 14년 만에 승무원 유니폼을 바꿀 때는 이탈리아 유명 디자이너인 잔프랑코 페레의 손을 빌렸다.

조 회장은 큰 그림을 그릴 때도 작은 부분을 놓치는 법이 없다. 10년 전 대당 4000억원이 넘는 초대형 항공기 A380을 도입(→10년 앞 내다본 조 회장의 결단)
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는 2003년 2월 그룹 회장으로 취임한 뒤 3개월 만에 에어버스가 제작한 좌석수 500석 이상의 A380을 구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미국은 9·11 테러 사태 여파로 어수선한 상황이었고 항공 업황도 좋지 않았다. 주변의 반대에도 조 회장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대형 항공기 시대가 열릴 것을 예견한 것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기가 점차 회복되면서 예측은 맞아떨어졌다. 결과적으로 선발주한 덕분에 저렴한 가격에 최신 항공기를 도입할 수 있었다.

물려받는 기업은 없다

가업을 물려받았지만 조 회장은 각별한 철학을 바탕으로 기업을 이끌어왔다. ‘기업은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자격을 갖춰 가꿔나가는 것’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고(故)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의 장남인 조 회장은 1974년 대한항공에 입사해 18년간 경영수업을 받은 뒤 1992년 대한항공 사장에 올랐다. 1997년 미국 괌 추락 사고 때 위기가 닥쳤지만 흔들리지 않고 침착하게 뒷수습을 했다. 1999년 대한항공 회장을 거쳐 조중훈 회장이 타계한 다음해인 2003년 한진그룹 회장에 올랐다.

조 회장은 취임 후 항공업계의 화물과 여객 부문 간 벽부터 허물었다. 다양한 분야를 두루 경험하고 다각도에서 판단할 수 있는 항공 전문가를 육성하겠다는 판단에서다. 지창훈 대한항공 사장은 조 회장이 시도한 융합형 인재 1호다. 조 회장은 2008년 서울여객지점장이었던 지 사장을 이례적으로 화물사업본부장으로 발령했고 2010년 사장으로 승진시켰다. 조 회장은 “경영자의 기본 조건은 업무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고 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라고 강조한다. 올초에는 대한항공 경영전략본부장을 맡고 있는 외아들 조원태 부사장에게 화물사업본부장을 겸직하도록 했다.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국적 항공사의 총수로서 해외 인맥이 두터운 조 회장은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일이라면 두 발 벗고 나선다. 2년 전 2018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 위원장으로 활약했고 현재 대한체육회 부회장, 대한탁구협회장, 한불 최고경영자클럽 위원장을 맡고 있다. 한 재계 인사는 “조 회장은 민간 외교관”이라며 “국내 최고경영자(CEO) 중 조 회장만큼 대외 네트워크가 넓은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재계에서 ‘젠틀맨’으로 통하는 그는 임직원들에게는 다정다감한 인상을 주기 위해 힘쓴다. ‘정이 많다’는 말도 많이 듣는다. 2004년 임파선암 판정을 받은 임원(부사장)을 미국 암 전문 병원으로 보내 치료를 받도록 했다. 조 회장은 작년 8월부터 현정화 전 탁구국가대표 감독이 어학연수를 받도록 지원하기도 했다. 자신이 재단 이사로 있는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USC) 총장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현 감독에게 맞춤형 코스를 제공해줄 것을 요청할 정도로 세심하게 배려했다.
(→‘정 많은 남자’ 조 회장)


디테일에 강하면서도 그룹 전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조직원들에게 뚜렷하게 제시해온 조 회장은 10년 뒤 세계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항공그룹으로 도약하기 위해 미개척 지역 방문 스케줄을 마련 중이다.

전예진 기자 ac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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