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금융팀 = "저는 이 순간 엄숙한 마음으로 헌법 제76조 1항의 규정에 의거하여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대통령 긴급명령'을 반포합니다.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루어집니다"
1993년 8월 12일 김영삼 대통령의 긴급명령과 함께 한국 금융사에 한 획을 그은 금융실명제가 도입됐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되기 직전까지 이 사실을 아는 이들은 대치동의 한 사무실 빌딩과 과천의 아파트를 빌려 '비밀 작업'을 한 10여명의 경제관료와 연구원들 뿐이었다.

당시 재무부 세제실 사무관이었던 백운찬 현 관세청장은 "소문이 퍼질 경우 금융기관의 돈이 싹 빠져나가 난리가 날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비밀 보장'에 생명을 걸었다"고 20년 전을 회상했다.

이처럼 세간의 이목을 피해 금융실명제 도입을 준비했던 주역들이 20년 만에 한 자리에 모인다.

이경식 당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국회 부의장을 지낸 홍재형 당시 재무부장관, 금융위원장을 지낸 진동수 당시 재무부 과장, 사무관으로 실무를 맡았던 최규연 현 저축은행중앙회장과 백운찬 관세청장 등 12명은 오는 12일 서울의 한 식당에서 모임을 갖고 금융실명제 20주년에 대한 소회를 나눌 계획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몸이 좋지 않아 참석이 어려운 것으로 전해졌다.

모임에 참석할 예정인 한 관계자는 "금융실명제의 주역들이 20년만에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이기로 했다"면서 "금융실명제는 한국사에 한 획을 그었던 작품이라는 자부심을 아직도 갖고 있다"고 말했다.

홍재형 전 국회부의장은 "금융실명제를 제일 싫어하는 쪽은 정치권과 대기업이었다"면서 "당시 선거에서 불가피한 것이 정치자금이었다는 면에서 정치권에서 상당한 반발이 있었다"고 전했다.

진동수 전 금융위원장은 "금융실명제는 나쁜 관행을 끊는 계기가 된 훌륭한 정치적 결단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정치가가 아닌, 정책을 30년 이상 한 사람으로서 볼 땐 아쉬운 측면이 있다"면서 "지금은 사람들이 다 잊어버렸지만 그 당시 긴급명령으로 실명제를 실시했으며 정착 과정에서 여러 선의의 불편이나 문제가 발생했다"고 전했다.

그는 "우려했던 경제 혼란이나 시장 혼란은 사전에 다 짚고 준비했기에 큰 부작용은 없었지만, 실명으로 전환해야 하는 개별 거래와 관련해 기존 관행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문제들이 많아 유권 해석을 하고 보완을 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다"고 설명했다.

백운찬 관세청장은 "당시 금융실명제 준비단에 뽑힌 실무진 모두가 주변에 외국 출장 간 것으로 꾸몄다"면서 "과천 주공아파트 504동 304호를 넉 달간 빌려 비밀 작업을 벌이기 시작했는데, 관리인과 아파트 이웃 주민에게는 교수들이 급한 논문작업을 하고 있다고 둘러댔다"고 말했다.

그는 "만약 금융실명제 준비 사실이 외부로 유출됐다면 공직생활 그만둬야 하는 분위기였다"고 전했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