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중공업 드릴십
삼성중공업 드릴십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육지 근처 얕은 바다에서 주로 이뤄지던 해상 유전 개발이 점차 심해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국제유가가 뛰면서 심해 유전 개발도 경제성을 확보할 수 있어서다.

대형 선박 형태의 시추설비가 필요했다. 1996년 미국의 석유 메이저인 코노코필립스는 삼성중공업에 1만피트(3000m)를 팔 수 있는 심해용 드릴십(drill ship·시추선)을 개발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심해용 드릴십을 제작하는 게 당시로선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삼성중공업은 드릴십을 만든 경험이 전혀 없었다.

경영진이 고민을 거듭한 이유다. 그렇지만 유조선 등의 수주가 부진해 위기 타개를 위한 새 전략이 필요했다. 그 무렵 엔 약세를 등에 업은 일본의 경쟁력이 높아진 데다 국내 1, 2위 업체인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이 설비를 늘리면서 3등 삼성중공업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졌다.

리스크가 컸지만 결국 드릴십 개발에 나서기로 했다. 삼성 엔지니어들은 해상 엔지니어링 업체가 몰려 있던 미국 휴스턴에 1년 이상 머물며 드릴십 개발에 착수했다. 그리고 1년반 만인 1998년 삼성중공업의 첫 드릴십인 ‘딥 워터 패스파인더호’를 건조하는 데 성공했다.

다른 조선사보다 10년 일찍 시작한 심해용 드릴십 건조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안겨줬다. 삼성중공업은 드릴십 시장점유율 42% 수준으로 이 분야 세계 1위다. 1996년 이후 전 세계에서 발주된 드릴십 139척 중 59척을 수주할 만큼 이 분야의 강자로 발돋움했다.

김수언 기자 sookim@hankyung.com

■ 경영 시사점 1 1등을 넘을 기회는 2등의 불리함에 있다

후발기업은 역량이나 경험에서 선발기업에 절대적으로 불리하다는 것이 통념이다. 앞선 연구개발(R&D) 수준과 풍부한 시장 경험을 후발기업이 극복하기란 쉽지 않다. 세계 1위 제약회사인 화이자나 청량음료업체 코카콜라의 아성이 쉽게 깨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후발기업에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2등이라는 불리함 속에서 1등 기업을 넘어설 기회를 찾을 수 있다. 후발기업은 새로운 사업 기회를 포착하는 데 상대적으로 유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선발기업은 주력 사업이나 시장을 방어하고 확대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기 때문이다. 삼성중공업이 드릴십에 관심을 둘 때 선두 업체들은 기존의 컨테이너선, 유조선 등을 수주하는 게 훨씬 수익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1등으로선 주력 사업과 큰 관련이 없는 신규 사업은 많은 추가 투자가 필요하다고 판단할 가능성이 높다. 새로운 기술이나 인력에 대한 신규 투자보다 기존 사업 분야에 대한 투자가 부담도 작고 단기적으로 효과적이기 마련이다. 모토로라나 소니가 강점을 가졌던 아날로그 기술에 치중한 나머지,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기회에 적극적이지 않아 삼성전자에 밀린 것도 비슷한 사례다.

파괴적 혁신 이론으로 유명한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교수는 ‘성장과 혁신(The Innovator’s Solution)’에서 선도 기업이 갖는 ‘한계적 사고’의 오류를 꼬집었다. 일반 투자이론에선 미래와 관련된 의사결정을 할 때 과거 투자 즉, 매몰비용을 무시하고 한계비용과 한계수익만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계적 사고에 의하면 선발기업은 기존 사업을 보완 또는 확대하는 것이 신규 사업 투자보다 언제나 합리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사고방식은 기업이 미래에 필요한 능력을 키울 수 있게 이끌기보다는 지금까지 이룬 성공을 최대한 활용해야겠다는 편견에 빠지게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후발기업은 선발기업을 넘어설 수 있는 기회를 발견하게 된다.

경영 시사점 2 미래 예측의 최고 방법은 미래창조다-피터 드러커

경영학의 구루로 꼽히는 짐 콜린스는 ‘위대한 기업의 선택(Great By Choice)’에서 위대함은 어떤 환경에 놓였느냐가 아니라 신중한 선택과 규율 있는 실행의 문제라고 말한다. 위대한 기업이 되려면 변화가 필요한 때와 그렇지 않은 때를 구별하고, 시장 흐름을 읽고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파악한 다음, 적절히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삼성중공업의 성공 요인은 적절한 변화의 때를 파악하고 경쟁사보다 빠르게 신(新)시장의 기회를 선점한 덕분이다. 선두 업체들이 경쟁이 치열한 레드오션에 안주하는 사이, 변화를 선택하고 10년 일찍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블루오션의 신시장을 개척했다. 또 선택과 집중을 통해 스피드 경영을 실현함으로써 발빠르게 제품을 시장에 내놓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강하게 만들 뿐이다’라는 니체의 유명한 말이 있다. 혹독한 경쟁과 불확실한 경영환경 속에서 불가능해 보이는 도전을 선택하고 이를 성공의 열매로 만든 스토리는 호시탐탐 역전을 노리는 후발기업 경영자들에게 의미있는 시사점을 제공한다.

하지만 삼성중공업이 현재의 성공에 안주해 미래의 신시장에 대한 고민 없이 방어에만 몰두한다면 한때 시장을 선도했다가 몰락의 길을 걸은 기업들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 필름 카메라의 대명사였던 코닥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는 시장 변화를 무시하다가 파산했다. 노키아도 비슷한 이유로 몰락했다. 2000년대 중·후반 애플이 아이폰을 내놨을 때 당시 노키아 최고경영자는 “조크(joke) 같은 제품이다. 시장에서 통하지 않을 것이다”고 호언장담했다. 스마트폰이라는 신시장을 외면하고 타성에 젖어 혁신을 잃어버린 노키아는 이후 큰 실패를 겪게 됐다.

■ 경영 시사점 3 지속가능한 우위는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다

리처드 다베니 미국 다트머스대 교수는 저서 ‘하이퍼컴피티션(Hypercompetitive Rivalries)’에서 경쟁 우위는 오랫동안 존속하지 않으며 시간·환경 변화에 따라 우위가 약해지기 마련이라고 봤다. 기존 우위를 지속하려는 전략은 기본적으로 수확 전략(harvest strategy)이지 성장 전략이 아니라는 의미다.

성공적인 기업은 새로운 우위를 계속 개발하는 기업이다. 동태적으로 보면 지속가능한 우위는 존재하지 않는 허상일 뿐이며, 계속되는 일련의 우위가 다이내믹한 시장에서 생존해야 하는 기업들이 추구해야 할 방향이다. 이런 관점에서 기존 우위에 집착하는 1등 기업에 기존 우위는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기존 시장에서의 우위에 취하게 되면 중요한 신시장을 놓치는 우를 범할 가능성이 커진다. 영원한 1등은 없으며 1등 자리를 위기의 자리로 보는 겸손함을 유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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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라이프] 삼성중공업, 2등의 절박함으로 심해 드릴십 '신시장' 을 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