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원회가 벤처생태계 조성을 위해 3년간 6조원 규모의 이른바 성장사다리펀드 조성·운영 계획을 발표했다. 벤처기업들이 사업화 단계에서 도산하는 이른바 ‘죽음의 계곡(death valley)’을 건널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정책금융공사 산업은행 등 이른바 정책금융을 총동원하고 민간금융까지 유치하겠다는 게 핵심이다.

그러나 정책금융을 미끼로 한 이런 식의 펀드는 이미 과거 정권에서도 숱하게 시도됐던 단골 메뉴다. 성장사다리펀드라고 하지만 정책금융의 다른 부분에서 운영되던 자금을 이쪽으로 끌어와 옮기고 간판만 바꿔 마치 새 펀드인 양 내놓은 것일 수도 있다. 아니 필시 그렇게 되고 만다. 그리되면 기왕의 지원사업에서는 자금이 줄어들게 되고 벤처들 역시 이름을 바꾸어 달고 새로운 지원 계정으로 옮아타고….

정부가 ‘죽음의 계곡’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도 실은 벤처의 속성을 잘못 알고 하는 소리다. 많이 태어나고 많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벤처의 본질이요, 운명이다. 벤처 본산인 실리콘밸리에서도 성공확률은 0.2%에 불과하다. 정부의 선의는 이해할 만하지만 데스밸리를 건너뛰게 한다는 자체는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왜들 이렇게 반시장적 비현실적 정치 언어들만 골라서 하는지 그게 궁금할 정도다.

더구나 죽음의 계곡은 벤처기업이 시장에서 혹독하게 검증받는 기간이다. 냉정한 평가를 거쳐 투자자로부터 자금을 유치받은 벤처는 살아남고, 그렇지 못하는 벤처는 죽는 것이다. 제대로 된 벤처인지 여부가 시장에서 가려지는 과정이 바로 데스밸리다. 정부가 관제펀드를 동원해 죽어야 할 벤처를 살려놓으면 정작 살아날 벤처가 죽게 된다.

관제펀드가 늘 도덕적 해이를 양산하거나 대형사고를 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금융위가 벤처를 지원하려면 관제펀드를 조성할 게 아니라 경쟁력 있는 민간 벤처캐피털을 키우고, 대기업의 벤처출자와 인수합병의 길을 확 열어주는 게 먼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