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화성 비아이티범우연구소에 세워진 사훈비. 김명원 범우연합 회장이 40년 전 창업 당시 선포한 사훈인 ‘인본기업·사회공헌’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정동헌 기자 dhchung@hankyung.com
경기 화성 비아이티범우연구소에 세워진 사훈비. 김명원 범우연합 회장이 40년 전 창업 당시 선포한 사훈인 ‘인본기업·사회공헌’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정동헌 기자 dhchung@hankyung.com

지난 40년 동안 단 한 번의 구조조정도, 노사분규도 없었던 회사. 직원이 잘못을 해도 해고하지 않고 정년을 보장하는 회사. 건강만 허락하면 60세가 넘어서도 일할 수 있는 회사. 인재를 데려오는 게 아니라 평범한 사람을 뽑아 인재로 키우는 회사. 불황에도 매년 20% 이상 성장하는 회사.

서울 양재동에 본사를 둔 범우연합(회장 김명원·73) 얘기다. 범우연합은 압연유 절삭유 방청유 코일코팅제 등 산업용 특수윤활유와 소비재인 친환경 과일·채소 세정제를 만드는 중견 그룹이다. 그룹 안에 국내 법인 5개와 중국 베트남 미국 유럽 등 해외 법인 8개 등 총 13개 법인을 두고 있다.

○위기 속 연 20% 고속 성장 주목


40년간 감원·노사분규 제로…산업용 윤활유 '빅3' 반열에…비결은 직원 중시 '人本 경영'
1973년 5월 서울 충무로에서 범우화학이란 이름으로 출발해 40년 만에 매출 3500억원, 종업원 738명(지난해 기준)의 중견그룹이 됐다.

범우연합은 지난 3년 새 매출이 83% 늘었다. 2009년 1913억원이던 것이 2010년 2530억원, 2011년 3181억원에 이어 지난해는 3500억원으로 증가했다. 연평균 20%가 넘는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경제침체기에 이렇게 고속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범우만의 특별한 노하우가 있다는 게 창업자인 김명원 회장의 설명이다.

그중 첫째가 한 우물 전략이다. 범우연합은 40년 동안 산업용 특수윤활유라는 한 우물을 팠다. 한양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한 김 회장은 서독과 미국에서 공부했다. 서독에서 유학할 때는 막스 베버에 심취했고 독일식 경영에 관심을 가졌다. 귀국 후 한때 중앙대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창업에 나섰다. 지인에게 소개받은 미국의 로켓용 윤활유인 ‘WD-40’에 꽂혀서다. 로켓이 발사되기 전 비를 맞으면 녹이 슨다. 이를 막는 게 바로 이 제품이다. 이 제품을 수입·판매하면서 동시에 국산화에 나섰다.

그 뒤 압연유 코일코팅제 방청제 등으로 생산제품군을 확대했다. 압연유는 철강을 얇게 뽑아낼 때 쓰는 오일이다. 방청제는 금속의 부식을 막는 제품이다. 아무리 멋진 자동차라도 녹이 슬면 볼품이 없어진다. 이를 막아주는 게 바로 방청제다. 강판은 윤활유가 적절히 공급돼야 빠른 속도로 생산된다. 고속으로 회전하며 쇠를 깎는 절삭공구도 적당한 오일이 주입돼야 열 발생을 막아 절삭효율이 높아진다. 이런 산업이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중요한 역할을 하는 화학제품 생산 외길을 걸어온 것이다.

○‘기술 지상주의’ 전략 주효

두 번째는 기술 지상주의다. 그는 창업한 지 불과 2년 뒤 사내에 연구소를 만들었다. 연구개발의 중요성을 초기부터 절감한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전체 인원의 약 10%인 70명을 연구개발 부서에 배치했다. 여기에는 석·박사급 인재 17명이 포함돼 있다.

김 회장은 “발명특허 건수는 17건이지만 실제 개발한 기술은 100건이 훨씬 넘는다”고 말했다. 화학제품 특성상 성분이 공개되면 금방 복제할 수 있어 아예 특허를 출원하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김 회장은 “현재 생산하고 있는 제품은 1500여종에 이른다”고 설명했다. 전형적인 다품종소량생산체제다. 이들 중 압연유 절삭유 방청유 등 몇 개 제품은 세계 3대 메이커 수준의 경쟁력을 갖고 있다.

셋째는 글로벌화다. 김 회장은 중국 베트남 인도 체코 미국 등 8곳에 해외법인을 만들어 현지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이 중 4곳은 생산공장, 4곳은 판매법인이다. 생산과 판매만 글로벌화한 게 아니다. 그는 “유종별로 세계적인 기술을 가진 기업 연구소들과 지속적인 기술 교류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는 미국 독일 스위스 스페인 일본의 기업도 있다. 기술 수출에도 나서 중국 인도 일본 독일 등 8개국에 10여건의 기술을 수출해 로열티를 받고 있다. 미래핵심기술 개발에도 열심이다. 나노기술 기반 고기능 오일, 신재생에너지 및 친환경 기술, 바이오 기술 등이 그런 것들이다.

○인본 경영이 지속 성장의 진짜 비결


하지만 한 우물 전략 등만으로는 이런 성장을 다 설명할 수 없다. 진짜 숨은 비결을 가늠할 수 있는 행사가 지난 14일 경기 화성 석포리에 있는 범우연합 비아이티범우연구소에서 열렸다. 이날 연구소에서는 사훈비 제막식이 있었다. 커다란 돌의 가장 위에는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의 글씨로 ‘인본기업·사회공헌’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김 회장은 40년 전 범우화학으로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이 사훈을 썼다. 그는 “회사를 만들기 전에 인본경영과 사회공헌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사훈을 먼저 정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실제로 오일쇼크와 외환위기를 넘기면서 한 명도 감원하지 않았다. 범명장학회를 만들어 전혀 연고도 없는 강원도 평창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고 자신의 지분 중 상당 부분을 종업원에게 넘겨 사실상 종업원이 주인인 회사를 만들었다. 그룹 내 4개 법인의 사장은 1970년대 중반에 입사한 직원 출신이다. 이종구 범우화학 사장(60), 최대영 (주)범우 사장(61), 김용태 범우아이티루브리컨트 사장(61), 최종우 총괄관리본부 사장(58)이 그들이다.

직원을 믿고 사랑하고 화합한 것이 진짜 고속 성장의 비결이라는 게 김 회장의 얘기다. 그는 이 같은 인본의 탄탄한 경영 기반 위에 기술 경쟁력 세계 1위 기업의 비전을 세워놓고 있다.

김 회장 방에는 ‘자원유한·창조무한’이라는 글귀가 쓰인 액자가 걸려 있다. 그는 “철강·자동차·전자제품의 완성도를 높이려면 결국 산업용 ‘유제(fluid)’의 품질이 중요하다”며 “고객의 성공을 돕는 게 우리의 사명인 만큼 고품질 제품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하겠다”고 강조했다.

“사업 보국하라던 유일한 박사 격려…고교 이래 줄곧 사표로 삼았죠”

40년간 감원·노사분규 제로…산업용 윤활유 '빅3' 반열에…비결은 직원 중시 '人本 경영'
1950년대 후반. 까까머리 고교생이 서울 대방동 유한양행에 들어섰다. 서울공고 재학생 대표로 기업을 배우기 위해 이 회사 창업자 유일한 박사를 찾은 것이다. 그 학생은 “기업이 무엇인지, 경영이란 어떤 것인지”를 물었고 유 박사는 친절하게 자신의 가치관과 기업관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자네는 훌륭한 기업인이 될 자질이 있으니 나중에 사업으로 보국을 하라”고 격려했다.

그 고등학생이 바로 김명원 회장이다. 이 말 한마디가 그의 인생 항로를 결정했다. 그는 유 박사를 평생의 사표로 삼았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인본’, 공을 세워 사회에 보답한다는 ‘공헌’이라는 사훈도 이렇게 만들어졌다.

김 회장이 가장 아끼는 물건 중 하나가 40년이 넘은 빛바랜 공책이다. 여기에는 1973년 5월7일 창업하면서 직원들에게 얘기한 내용이 달필의 펜글씨로 적혀 있다.

‘…우리 범우화학은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인간의 기업으로, 유일한 선생의 기업정신을 본받아…’라는 내용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가 말하는 인본주의의 핵심은 인간을 위한 경영이고 더불어 사는 경영이다.

김낙훈 중기전문기자 n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