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극장에 가지 못하면 비디오테이프를 대여해서 영화를 보곤 했다. 대부분 VHS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진 테이프였다. 하지만 기술면에서는 VHS 방식보다 소니의 베타방식이 훨씬 훌륭했다. 화질도 선명하고 반복해서 복제해도 화질 손실이 별로 없는 그야말로 환상적인 기술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기술적으로 앞선 소니의 베타방식보다 시장을 지배한 건 다른 회사의 방식이었다. 왜 그랬을까. 소니는 기술을 공유하는 대신 혼자 독점하려고 했다. 이에 맞서 다른 회사들이 VHS 방식을 만들어 공유하면서 시장을 주름잡게 된 것이다. PC시장 초기에 애플도 훌륭한 운영체제(OS)를 만들었으나 다른 소프트웨어(SW) 기업들과 공유를 하지 않음으로써 시장에서 참패한 기억이 있다. 이처럼 정보기술(IT)은 독점하면 많은 이익을 내고 잘할 수 있을 것 같으나 오히려 공유해야 더 커지고 더 많은 것을 창출하는 속성이 있다.

요즘의 세계적인 IT 트렌드 역시 공유하고 융합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산업분야뿐 아니라 사회, 행정 분야까지 IT기술이 영역을 넓히고 융합하면서 한 단계 높은 혁신 서비스를 만들어가는 시대가 됐다. 가령 전자 민원발급 같은 전자정부 시스템을 보더라도 IT와의 융합을 통해 행정이 몰라보게 편리해지지 않았는가. 어디 이뿐이랴. 무선전화기에 다양한 SW를 담은 스마트폰을 개발한 애플은 예전의 패배를 딛고 세계 1위 IT기업으로 성장했고, 씨티은행은 금융회사가 아닌 SW 회사라며 SW를 통한 혁신에 앞장서고 있다. 구글이라는 SW회사가 무인자동차 개발에 성공하면서 이제 자동차는 기름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SW로 움직이는 전자제품이라고 불릴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듯 사회의 모든 분야가 IT기술로 혁신을 이루고 변화하는 것이 새로운 패러다임이 된 것이다.

이런 시기에 어떻게 하면 IT와의 융합을 잘 이끌어 산업과 사회 각 분야를 혁신할 것인가에 의견이 분분하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IT를 한 곳으로 모아 정보통신기술(ICT) 전담부처를 만드는 것보다는 모든 부처가 IT융합을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해 보인다. 그래야 IT가 IT만의 울타리를 넘어 공유되고 확산될 수 있지 않겠는가. IT만 따로 모아놓기보다 차라리 행정부서마다 IT기술 기반의 융합혁신 조직을 설치하는 것은 어떤가. 이렇게 해서 복지부는 첨단 응급구호시스템 같은 IT기반의 효율적인 복지 시스템을 구축하고, 국방부는 IT기반의 첨단 국가방위시스템을, 교육부는 스마트 교육시스템 개발에 매진하게 하는 것이 효율적이 아닐까. 이런 식으로 한국의 국가 시스템을 분야별로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또한 산업적으로도 IT융합이 한국의 주력산업인 자동차, 조선, 섬유, 에너지 등 전 분야에서 활발하게 진행돼야 경쟁력을 높이고 나아가서 새로운 산업을 창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000년대까지는 IT기술 자체를 빠르게 도입하고 이런 기반을 만들어 놓는 것이 국가적으로 필요했고 또 잘해냈다. 하지만 지금은 IT기술이 그 자체로 가치있기보다 다른 산업이나 생활 속에서 융합돼 그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생활을 변화시키는 것에 더 큰 가치가 있다.

이런 IT 기술 패러다임의 변화로 볼 때 최근 ICT 전담부처 부활 주장은 냉정하게 판단해볼 필요가 있다. 면 요리인지 국물 요리인지에 따라 접시라든가 대접을 따로 준비해야 하듯 조직보다도 어떻게 하면 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는지 내용을 먼저 생각하자는 얘기다. 자칫 정치적인 이유로 그릇, 즉 조직부터 결정한다고 하면 요리와 그릇이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부활된 ICT 전담부처가 다른 부처에 IT기반으로 혁신하자고 주장할 때 그 해당 부처가 문을 활짝 열고 융합을 잘할 수 있을까. IT산업의 패러다임을 직시하고 산업의 관점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지금의 여러 논의가 형식과 틀에 얽매여 미래를 그르치지 말고 산업을 제대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돼야 한다.

박수용 < 정보통신산업진흥원장 parksy@nip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