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 매니지먼트] 이름 빼고 다 바꾼 재규어, 디자인으로 다시 포효
‘재규어스러움(Jaguarness)’이라는 말이 있었다. 영국 자동차 산업을 대표하는 럭셔리 세단인 ‘재규어’의 우아함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영국의 대표 스포츠유틸리티(SUV) 브랜드인 랜드로버는 ‘사막의 롤스로이스’라고 불리며 20세기 중반까지 럭셔리 SUV 자리에 군림해왔다.

1980년대 이후 재규어와 랜드로버는 하향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급기야 경영난으로 미국의 포드사에 매각된 뒤 다시 인도의 타타자동차로 넘어가면서 재규어 랜드로버로 통합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한동안 판매 부진에 시달리던 재규어 랜드로버의 판매량은 올해 총 30만대가 넘을 것으로 보인다. 재규어 랜드로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전문가들은 “재규어 랜드로버가 ‘디자인 경영’으로 사상 최강의 제품 라인업을 갖추면서 화려하게 부활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고인 물은 썩는다

재규어 랜드로버가 어려움을 겪은 가장 큰 이유는 디자인 측면에서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메르세데스 벤츠와 BMW 등 독일 럭셔리 브랜드들에 밀려 ‘구식’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결국 두 회사는 경영난에 빠졌고 1989년과 2000년 미국의 포드사에 각각 매각됐다. 이후에도 판매 감소에 시달리던 재규어 랜드로버는 2008년 인도의 타타자동차로 넘어갔다.

자동차 업계는 타타자동차가 재규어 랜드로버를 인수한 것을 비관적으로 평가했다. 포드가 타타자동차를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한 2008년 1월3일 이후 타타자동차의 부도확률을 나타내는 신용파산스와프(CDS) 가격은 두 배 이상으로 뛰었다. 발라지 자야라난 모건스탠리 자동차산업 애널리스트는 “시너지효과도 기대할 수 없고 비용만 드는 가치파괴적 인수”라고 평가했다.

◆재규어의 디자인 경영

타타자동차는 재규어 랜드로버 인수 후 대대적인 수술에 들어갔다. 먼저 세계 3대 디자이너로 꼽히는 이언 칼럼 수석 디자이너에게 재규어 랜드로버의 디자인 전권을 위임했다. 이언 칼럼은 영국 스포츠카이자 ‘본드카’로 잘 알려진 ‘애스턴 마틴’을 살려낸 실력을 발휘했다. 2008년 내놓은 중형 세단 ‘XF’는 “이름만 빼고 모든 걸 다 바꿨다”는 칼럼의 설명처럼, 그때까지 재규어를 상징하는 네 개의 둥근 헤드라이트와 재규어가 뛰어나가는 형상인 ‘리퍼’를 없앴다. XF는 전통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들으며 판매량이 크게 늘었다. 2010년 출시한 대형 세단 ‘XJ’와 이듬해 출시한 랜드로버의 럭셔리 소형 SUV 모델인 ‘레인지로버 이보크’도 혁신적인 디자인으로 성장세를 이어갔다.

디자인 경영은 국내에서도 빛을 보고 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지난 11월 한 달간의 해외 출장을 마치고 첫 오찬 상대로 정한 사람들은 삼성그룹의 디자인 핵심 임원들이었다. 이 회장은 오찬 자리에서 “21세기의 승부는 당신들 손에 달려 있다”며 디자이너들에게 힘을 실어 줬다. 적자에 허덕이던 기아자동차가 세계 자동차 업계로부터 주목을 받게 된 원동력도 ‘디자인 경영’이다. 정의선 부회장은 이언 칼럼과 함께 세계 3대 디자이너 중 한 명인 기아자동차 최고디자인책임자(CDO) 부사장을 영입해 디자인 전권을 위임했고 슈라이어 부사장은 K5, K3 등 K시리즈를 내놓으며 전문가들과 소비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프리미엄 이미지 지켜라

제품 전략과 함께 브랜드 이미지 전략도 타타자동차와 철저하게 구분했다. 재규어 랜드로버의 본사는 영국에 있으며 주요 경영진들도 인도인들이 아닌 영국인들이다. 또한 반조립제품(CKD)방식으로 랜드로버를 들여와 조립한 인도산 랜드로버는 인도 내수용으로만 판매하는 등 ‘Made in UK’라는 프리미엄 이미지를 이어갈 수 있도록 했다.

프리미엄 전략은 매출 상승으로 이어졌다. 2009년 매출액 49억파운드(8조5113억원), 4억파운드(6948억원)의 적자를 기록한 재규어 랜드로버는 올해 134억파운드(23조2758억원)의 매출과 14억8100만파운드(2조7725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릴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 4월 블룸버그 통신은 전문가들의 평가를 기준으로 재규어 랜드로버의 가치를 140억달러(15조1620억원)로 평가했다. 4년 만에 가치가 6배 이상 뛰어올랐다. 필 폽햄 재규어 랜드로버 글로벌 세일즈 총괄 사장은 “새로운 제품 개발을 위해 20억파운드(3조4740억원)를 투자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5년간 이 같은 투자가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고용유연성 강화해 경쟁력 확보

고용유연성 확보 및 재규어 랜드로버 노동조합과의 협력도 회사 경쟁력 강화의 숨은 주역이었다. 2009년 영국 공장 일부 폐쇄를 검토했던 재규어 랜드로버는 노조와의 합의를 통해 2010년 고용 시 임시직으로 채용한 뒤 1년 뒤에 고정 계약직으로, 2년 뒤 정규직으로 승급되는 새로운 임금 및 채용 시스템을 도입했다. 현재 직원 2만여명 중 1700여명이 파견 근로자 또는 계약직 신분이며 이들은 정규직 근로자 임금의 80% 수준을 급여로 받고 있다. 이 같은 고용유연성 확보를 통해 경쟁력을 키운 재규어 랜드로버는 최근 솔리헐, 헤일우드. 울버햄튼 등 3개 공장에서 총 3100명의 신규 인력을 채용했다.

런던=최진석 기자 isk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