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차례나 제사에서 지방(종이에 써 모신 신위)을 쓸 때 고인이 생전에 벼슬을 지냈다면 그가 누린 벼슬 중 최고위직에 해당하는 품계와 관직명을 적는다. 평생을 관직 없이 평민으로 살았다면 남자는 학생(學生), 여자는 유인(孺人)이라 쓴다. 학생은 ‘벼슬하지 않은 일반인’을, 유인은 그의 ‘부인 또는 아내’를 지칭한다. 그래서 부모님 제사상엔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라고 쓴 지방이 많이 세워지고, 무덤 앞에 선 묘비에도 ‘학생’이란 글자가 심심찮게 보인다.

어느 날 공원묘원 옆을 지나가던 등산객이 친구에게 들릴락 말락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이곳저곳 비석에 학생이란 글자가 써 있지.” 그러자 친구가 서슴없이 말을 받았다. “공동묘지에 새로 입학했으니까 학생이지. 안 그래.” 조상숭배사상이 많이 퇴조한 현 세태를 풍자한 조크다.

바야흐로 시향(時享)의 계절이 돌아왔다. 전통적으로 조상의 혼령에게 음식을 바치고 추모하는 제사는 명절 때 지내는 차례 외에 기제와 시향으로 나뉜다. 기제(忌祭)는 고인이 돌아가신 날 집에서 지낸다. 사대봉사라 하여 부모~고조부모까지 4대만 지낸다.

기제로 받들지 않는 5대조 이상은 음력 10월에 무덤에 제사를 지낸다. 이를 시향이라 하고 요즘이 그 시기이다.

그동안 기제를 모시던 조상이 이제 5대조 이상의 조상이 돼 시향으로 모셔야 한다면 어떤 절차와 제례가 필요할까. 예전에 지체 높은 명문가는 대개 집 안의 사당에 조상들의 신위를 보관해오다 기제 때가 되면 신위를 꺼내와 제사상 위에 올려놓고서 제사를 지냈고, 제사가 끝나면 다시 사당에 안치해왔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기제에서 시향으로 변경해야 할 조상이 되면 매위(埋位)라 해 사당에 모셨던 신주를 꺼낸 뒤 해당 무덤의 앞쪽에 묻는다. 사당에 신주를 모시지 않았다면 별도로 한지에 지방을 써 땅속에 묻는다.

국가에 큰 공을 세웠거나 덕망이 높은 분과 배우자는 특별히 불천위라 하여 매위하지 않고 계속 기제를 지내도록 나라에서 허락했다. 불천위 제사는 명문가임을 나타내는 증거 중 하나다.

요즘은 도시화와 핵가족화에 따라 생활환경이 크게 변해 불천위 제사조차 위기를 맞고 있다. 특히 출산율이 떨어지고 조상에 대한 숭배사상이 약화돼 기제에 불참하는 후손들이 많아지는 것은 어느 집안 할 것 없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리고 여성의 권위가 차츰 강해지는 세상이다 보니 어떤 남자는 자기 집 제사는 불참한 채 처가댁 제사는 꼬박꼬박 참석하는 후손도 있다고 한다. 세상에 뿌리 없는 나무가 없고, 조상 없는 내가 없다. 1년에 한 번 종중이 모여 지내는 시향만큼은 시간을 꼭 내 참석할 것을 권한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고, 먼 훗날 자기 역시 제삿밥이라도 받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제희 <대동풍수지리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