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인 위원장은 또 출근 투쟁 중이다. 그 연세라면 출근의 조건을 놓고 투쟁할 나이는 지났지 싶다. 자칫 하면 노인네 투정이 될 수도 있다. 스스로를 보수라고 자임하는 사람들 중에는 지금이라도 김종인을 내치지 않으면 절대로 박근혜에게 투표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차마 종북 후보자에게 표를 던질 수 없기 때문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더는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라는 항변이기도 하다.

사실 행복추진위원회라는 작명부터가 그렇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돼지가 애교스럽게 내세울 것 같은 이 구호는 김종인 씨가 정동영 후보 밑에서 일할 때부터 써왔던 낡은 좌익 간판이다. 국가는 국민의 행복에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이 헌법이 정한 행복추구권의 본질이다. 행복은 자유권이지 국가의 의무 혹은 국민의 청구권적 권리 목록에 포함되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런데 김종인과 새누리당은 의미를 뒤집어 국가의 책무로 규정되는 그런 행복을 주장하고 있다. 국가가 국민을 행복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명백한 좌익 슬로건이다. 새누리당이 이런 비열한 자세로 선거전을 치른다면 국민을 우습게 보는 것이다. 국민은 빅 브라더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그런 하찮은 존재가 아니다.

유력 대선 후보 3명이 모두 꿀을 바른 마약 보따리를 풀고 있다. 물론 한 명은 마약인 줄 알고 풀고 있고 다른 한 명은 마약이 아니라며 풀고 있고 나머지 한 명은 마약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다. 그러나 누구에게 정권이 흘러가든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다. 약속을 잘 지킨다는 면에서 박 후보가 가장 위험하다는 농담조차 나돌 정도다. 그렇게 선거를 통해 국가적 의사를 결집하고 국가 공동체의 나아갈 방향을 진지하게 아젠다화하는 일은 사라졌다.

대통령 선거가 이다지도 저질화한 것은 새누리당과 김종인 때문이다. 우익이 좌익의 깃발을 빼앗아 달리기 시작했으니 좌익은 설자리가 없어졌다. 새누리당의 싸구려 책사들은 이런 현상을 놓고 처음에는 박수를 치며 좋아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선후보를 평가하는 잣대 그 자체가 동시에 쓰레기통에 처박히고 말았다. 지금은 문제의 본질을 깨닫고 있는지 모르겠다. 대중이 단일화 정치쇼에만 눈길을 주는 것도 그 결과다. 박 후보의 공약이 필연적 저질화의 과정을 걷고 있는 것도 그렇다. 별별 공약이 발표되고 있다. 이제는 골목길 전봇대까지 언급해야 하는 지경이다. 구청장 선거를 한다는 것인지.

좌익의 선거전략은 포퓰리즘이다. 그게 본질이다. 그래도 나라가 중심을 잡는 것은 보수 가치가 살아있고 그것을 지키는 정치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통의 새누리당이 싸구려 좌익 정당이나 좌경 무소속처럼 놀고 있으니 이게 무슨 정당인가. 김종인 같은 이들을 기용해 경제민주화라는 좌편향 슬로건을 내걸었으니 ‘자유와 책임과 일자리’를 뼈대로 하는 보수 이념은 제멋대로 휘갈긴 낙서로 전락한 꼴이다. 그것이 새누리당 입장이라면 한국의 보수는 지금 새로운 모색에 나서는 것이 옳을 것이다.

경제민주화라면 민주통합당이 더 잘할 것이라고 보는 게 순리다. 겨우 차별화되는 것이 외교, 국방이라고는 하지만 그 경계선조차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다. 이는 지난 총선에서 비겁하기 짝이없었던 국회의원 공천의 당연한 결과다. 경제민주화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인식 수준에서라면 북한에 적당히 퍼주고 평화를 구걸하자는 대북 전략도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 새누리당에서조차 한·미동맹을 주장하는 사람이 사라진 지 오래 아닌가 말이다.

지난 주말 공개된 경제민주화 공약 초안도 그렇다. 기업인 범죄는 국민참여재판에 회부하고 대기업 집단의 사장단 회의까지 법적 책임을 지우겠다는 게 골자다. 이는 인민재판의 부활이요, 기업을 통일적 인격체가 아닌 다수결의 정치조직으로 보는 발상이다. 결코 보수의 가치라고는 볼 수 없다. 이런 황당무계한 좌익 이념을 내걸고 표를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나. 민주당이 따라오니 우리는 더 왼쪽으로!라는 식이다. 굳이 투표장에 나가야 할 이유가, 그리고 박근혜여야 한다고 주장할 이유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 박근혜 위기의 본질은 바로 이념의 방황이요, 훼절이다.

정규재 논설위원실장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