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는 한때 ‘생산성 역설(productivity paradox)’이 회자됐었다. 정보기술(IT) 투자가 늘어나는데도 생산성이 높아지지 않는다고 해서 나온 가설이다. 이 가설은 투자와 생산성 향상 사이의 시차 등 다양한 요인들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최근 한국에서는 정부가 연구·개발 예산을 계속 늘리는 데도 창의적 연구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다. 이른바 ‘코리안 패러독스’로 불린다. 만약 이 가설이 맞다면 정권마다 되풀이되는 정부조직 개편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일 것 같다.

철학없는 정부조직 개편

언제부턴가 대선후보들이 조직 개편을 들고 나오는 게 관행처럼 굳어졌다. 이익단체를 찾아갈 때마다 정부조직을 큰 선물처럼 내놓는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는 미래창조과학부를 만들고, 정보통신 전담부처도 검토하겠다고 공약한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는 과학기술부를 부총리 부처로 복원시키고, 정보통신부도 부활하겠다고 한다. 안철수 무소속 후보는 과학기술·정보통신·산업·사회 등 미래를 기획하는 미래기획부를 신설한다는 얘기가 들린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정부조직은 또 다시 개편의 회오리 속으로 휘말리게 됐다.

철학과 원칙, 논리가 있다면 또 모를까 그것도 아니다. 한나라당이 전신인 새누리당이 정권을 잡으면 정권 재창출이다. 같은 당에서 정부조직을 붙였다 뗐다 하는 꼴이다. 일관성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다. 민주당 공약은 정부조직을 5년 전 참여정부 때로 되돌리겠다는 발상이다. 당시 큰 정부라는 비판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자기들만 옳다는 오만함이 느껴진다. 안 후보의 미래기획부는 50년 전 경제기획원 부활을 연상시킨다. 그건 아니라고 하겠지만 벌어질 현실이 눈에 선하다. 공무원들이 전문가들을 들러리로 잔뜩 세워 놓고 자기들이 국가를 설계하고 통치하는 양 설쳐댈 게 뻔하다.

대선 후보들이 미래니 창조니 떠들지만 실상은 과거로 회귀하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더 한심한 건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궤변을 늘어놓는 행정학자들이다. 힘센 부처들은 놔두고 왜 허구한 날 과학기술, 정보통신 갖고 난리냐고 물으니 돌아오는 답이 걸작이다. 변화가 빠르기 때문이란다. 그런 논리라면 5년이 아니라 아예 1년, 아니 1개월마다 정부조직을 개편해도 부족하다.

진짜 행정학자들은 무엇이 본질인지 잘 안다. 과학기술, 정보통신처럼 변화가 빠른 분야는 정부 조직이 아니라 정부 역할과 일하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걸 말이다. 조직개편으로는 변화의 속도를 쫓아갈 수도 없거니와 그런 일은 기본적으로 시장의 몫이다. 오히려 그럴수록 정부는 장기적 관점에서 기초연구나 인재양성 등을 제대로 해주는 게 중요하다. 과학기술, 정보통신은 특히 그렇다.

창의·자율·융합에 역행

다시 질문을 던져보자. 한국에서는 투자를 해도 왜 창의적 연구 성과가 안 나오는가? 뭘 하나 해보려고 해도 정권만 바뀌면 다 뒤집어지기 일쑤인데 그게 가능할 리 없다. 10~20년 꾸준히 밀어줘도 나올까 말까 한 노벨과학상은 아예 꿈도 못 꿀 판이다. 창의적 연구를 위해 ‘자율’이 필요하다면서 지시하고 간섭하는 정부조직을 자꾸 만들겠다는 건 그야말로 이율배반이다.

정보통신도 다를 바 없다. ‘융합’을 외치면서 정작 정보통신을 칸막이로 가두는 조직 개편을 하겠다는 얘기다. 애플에 대한 대응 운운 하지만 누가 정부더러 애플과 싸워달라고 했나.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잘 싸우는 기업들 방해만 안하면 다행이다. 이 나라 정치인들은 정부조직 개편이 정답이 아니라는 걸 언제쯤 깨닫게 될는지….

안현실 논설·전문위원 경영과학博 ahs@hankyung.com